1991년 10월 19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광장에서 발생한 묻지마 살인 사건이다. 범인은 20대 시각장애인 김용제. 이 사람의 일대기는 책으로도 나왔다. <마지막 사형수>로 교도소 안에서 조성애 쟌 마르코 수녀와 나눈 편지를 바탕으로 제작된 책이다.
충청북도 옥천군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김용제는 어릴 때부터 시각장애[3]를 가지고 있었지만 불우한 가정환경으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의 어머니는 국민학교 때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갔고, 몇 년 후에 아버지마저 농약을 마시고 음독자살했다. 그후 시각장애와 소극적인 성격으로 집단따돌림을 당했고, 결국 국민학교만 졸업했다.
그리고 칼을 지니고 다니다 '강도 예비 음모'라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교도소에서 3개월간 복역을 한 적도 있다. 이후 서울과 부산에서 중국집 배달원, 멍텅구리배 선원, 나이트클럽 웨이터 등을 전전하며 힘들게 살아갔지만 시각장애로 인해 안정된 직장을 가질 수 없었고 급여 또한 제대로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마지막으로 다니던 화곡동의 양말 공장에서 해고된 뒤 세상에 대한 복수를 결심했다.
김용제는 양말 공장을 다니던 시절 사장의 프라이드 베타의 열쇠를 복사해서 가지고 다녔고, 그 차를 몰아 복수할 생각을 했다. 결국 1991년 10월 19일, 차를 몰고 여의도 KBS 본사 우측의 광장에 진입해 질주를 벌인다. 당시 국민학교 5학년이었던 지현일 군(12)과 유치원생 윤신재 군(6)이 먼저 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 뒤에도 계속 질주를 하여 어린이와 노인을 포함한 21명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200m를 더 달리다 자전거 보관함을 들이받은 뒤 멈추었다. 그 뒤 시민들에게 붙잡혔을 때 이를 뿌리치고 여중생 김병춘 양(13, 당시 신도림중학교 1학년)을 인질로 잡았으나 시각장애로 인해 제대로 대치하지 못했고, 이윽고 시민들에게 제압당했다.
사건이 일어나기 이틀 전 대구의 나이트클럽에서 방화로 인해 16명이 사망하는 거성관 방화 사건이 일어난지라 더욱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11월 19일 사형판결을 받았으며 이에 불복해 항소와 상고를 제기했지만 전부 기각됐고, 1992년 8월 18일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 판결을 받고 1997년 12월 30일 다른 사형수 22명과 함께 사형이 집행되었다.
여기서 그에게 치여 즉사한 당시 유치원생 윤신재 군의 할머니인 서윤범 할머니는 이런 사정을 듣고 되려 범인을 이해한다며 눈물을 흘리며 탄원서를 썼으며, 기도까지 해 주었다. "지금도 용제가 정말 새 사람이 될 수 있는 마지막 작은 실낱같은 희망을 안겨주신다면..." 윤신재 군의 가정이 천주교 신자 집안이었는데 그야말로 신앙의 힘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1993년 당시 문화방송 보도에 따르면 서 씨의 사연을 듣고 김수환 추기경이 나서서 사면을 요청했지만 결국 사형은 집행되었다. 서 씨는 사형 집행 당일에도 찾아왔다고 한다. 그가 사형을 당하기 전에 가톨릭에 귀의하여서인지 이 자리에 온 신부가 회고록에서 당시 상황을 썼는데, 그는 할머니에게 미안하다고 사죄했다고 한다.
<표창원의 사건추적>에 따르면, 정작 해당 살인사건으로 피해를 입은 생존자나 유족들에겐 보상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이미 1988년부터 '범죄 피해자 구조법'이 시행 중이었으나 법 내용이 미비하고 이 법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게다가 범행에 쓰인 프라이드가 가입된 종합보험은 도난 뒤 발생된 피해에 대해 보상해 주는 제도가 없었고, 대신 '책임 보험'에 따라 사망자는 최고 5백만 원, 부상자는 3백만 원까지 보상이 가능했으나, 이들의 아픔은 그마저도 갈음할 수 없었으며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스스로 극복해야 했다.
피의자는 앞서 인용한 대로 "무전유죄, 유전무죄"라고 했지만 이런 말을 외친 김용제가 해친 사람들은 자신에게 비극을 안겨다 준 당사자인 사회적 강자들이 아닌 무고한 어린이, 노인, 여중생 등 자신과 같거나 더 못한 사회적 약자들뿐이었다. 그 이전에 그 '복수'의 개연성마저 부족한 상황. 따라서 변명의 여지 없는 명백한 악질 범죄자이자 살인마이다. 그에게 사형이 선고된 것도 그런 까닭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