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영어문제 풀다 빡친 원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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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영어문제 풀다 빡친 원어민

수능 영어가 언제부턴가 그 목적을 잊고 완전히 중구난방하고 있다.

현실에서는 대학생들조차도 학부 과정에서 영어로 된 논문을 읽는 경우는 흔치 않다. 전공 서적을 원서로 읽는 것과 아예 영어로 된 논문을 읽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게다가 본래 논문이라는게 재빨리 읽으라고 있는것도 아니고, 한 번 읽었다고 해서 한 번에 그 내용을 이해하는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랬기 때문에 초창기 외국어영역에서 논문급 수준의 지문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일개 고등학생들에게 대학교에 입학할 수준을 테스트하는 정도로 대학원에서나 볼 법한 영어 논문의 수준을 요구하고 있으니 이는 극소수의 뛰어난 학생을 제외한 대다수의 평범한 학생에게는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정작 대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양 영어 과목은 오히려 원어민과 함께 하는 말하기 듣기 수업 위주다. 대학교에서 영어 논문을 읽을 기회보다 원어민하고 말할 기회가 더 많으며, 따라서 대학교 성적을 잘 받으려면 영어 논문을 읽는 게 아니라 원어민하고 소통이 되는 게 더 중요하다. 애초에 영어 논문 읽을 기회가 그렇게 많다면 대학에서도 영어 논문을 읽을 능력을 기를 수 있는 수업을 편성했을 것이다. 게다가 대학생이 되면 교환학생이든 배낭여행이든 외국인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아지므로 소통 능력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대학교의 실제 현실을 비추어 볼 때, 논문 타령하면서 이상한 지문을 내는 것이 과연 대학생들에게 진짜 필요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또한 지나치게 표현을 꼬아서 출제하는 경향이 강해진 바람에 차라리 그냥 진짜 영어 논문이나 전공 서적의 일부분을 그대로 발췌해서 주는 게 더 나을 지경이 되어버렸다. 실제로 논문을 수능영어식으로 썼다간 욕 엄청 먹는다. 이제는 논문의 논리정연한 글 구조마저 킬러 문제를 만든다는 미명하에 내용은 논문의 내용이지만 논리정연하지 않고, 어휘도 부자연스러우며, 결과적으로 논문도 뭣도 아닌 정체불명의 글을 보고 풀어야 되는 시험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어권 대학에서도 수능 영어 스타일의 일부러 복잡하고 어렵게 쓴 글은 흔히 소설작법 관련해서 가장 금기시되며, 특히 인문계열 교수들은 보자마자 F를 주저없이 때리는 겉멋만 잔뜩 들어간 쓰레기나 다름없다고 평가한다. 언어는 어디까지나 소통의 수단이니까. 그런데 이런 스타일의 글들이 한국에서는 보란듯이 대학 입학용 시험에 쓰이고 있는 것이다. 정말 제대로 된 독해력을 평가하고 싶다면 문장 스타일이 아닌 내용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생활영어 시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생활영어 분위기를 흉내내려 한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화자의 심경이나 대화의 분위기를 묻는 문제이고, 심지어는 화자나 청자의 직업이나 언급여부를 묻는 문제까지 가면 이건 전공책이나 논문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문제가 된다. 실제로 평균점수를 유지시키기 위한 저난도 문제들은 슬슬 생활영어 레벨로 낮아져 있으며, 이러한 문제들 때문에 수능 영어는 태생적으로 난이도 논란과 활용성 논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청해 문제와 독해 문제의 수준 차이인데, 원래 시험의 목표가 지나치게 학술적 사용에만 치우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위에 언급한 '생활영어 분위기를 흉내내기' 위해 가장 만만한 듣기평가의 수준을 도에 지나치게 많이 낮췄기 때문이다. 미국의 초등학생들도 수능 영어 듣기보다는 말을 빠르게 하며, 심지어는 TOEIC조차도 그렇게까지 느리게 말하지는 않는다. 당장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자막 없이 보라고 하면 수능 영어 1등급 받는 학생들이라 해도 버거운 정도가 아니라 사실 해외 안나가고 국내에서 수능 공부 열심히 해서 1등급 받은 학생들은 다부분 디즈니 애니메이션 대사의 3분의 1도 못 알아들을 것이다. 수능 영어 듣기는 6등급 수준도 다 맞을 정도로 쉽다. 결과적으로 읽기는 영어가 모국어인 대졸자들조차도 풀지 못하는 문제들이 나오지만 듣기는 어린이 애니메이션 한 편 볼 수준도 되지 못하는 형편없는 수준의 밸런스가 생겨버리게 된다. 또 그러면서도 인터뷰나 특정 TV 광고 스타일 등 수능 영어와 같은 패턴을 가진 일부 고급 듣기는 어느 정도 되는(물론 여기서도 말이 조금만 빨라지면 어버버한다.) 기이한 현상이 생겨난다.

덧붙여 시험을 위한 시험으로 계속 악화되다 보니, 통칭 킬러 문제라 불리는 고난도 '만점 방지 목적' 지문들은 위험수위를 넘어서서 말 그대로 '쓸데없는 영역'에까지 들어섰다. 잘못된 어휘 선택은 아무 문제도 아니라는 듯 남발하고, 문법을 고어 수준으로 복잡하게 잡아늘려 인용한 원문의 구조가 다 무너져 쓸데없이 문장이 길어질 정도이며, 추상적 표현들이 실제 어법에서 안 쓰이는 방식으로 과하게 등장해 오답 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위에 예시로 링크된 수능 영어 관련 동영상에도 나오듯 '중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문장'이나 '보기에 답이 없어 보이는 문제'들이 전부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결국 변별을 위해 난이도를 높이고, 그 난이도 높아진 시험에 익숙해진 수험생들의 수험생들의 실력이 상향평준화되고, 결국 그 수험생들을 변별하기 위해 난이도를 또다시 높이는 악순환이 지난 몇 년 동안 계속 반복되고 있다. 이는 학력고사 때보다도 더 퇴보된 부분으로, 학력고사 세대들이 수능 영어를 보고 기겁하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