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델란드 튤립 버블 파동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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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회.정치.역사.인물

네델란드 튤립 버블 파동사건

17세기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벌어진 과열 투기현상으로, 사실상 자본주의 최초의 버블 경제 현상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남해거품사건, 프랑스 왕국의 미시시피 거품과 더불어 고전 경제기의 경제위기 중 하나로 꼽힌다.





거대 제국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네덜란드에서 과중한 세금과 프로테스탄트의 급격한 성장 등이 원인이 되어 1568년에 독립전쟁이 발발했고, 1648년 마침내 네덜란드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국제적으로 공식적인 독립국으로 인정받았다.

저지대 지역 가운데 가장 부유하고 증권거래소와 은행이 밀집해 있던 도시인 안트베르펀이 포함된 남부 지역이 1578년 에스파냐에 점령당한 뒤로, 암스테르담이 새로운 금융 중심지로 각광받으면서 전문인력이 대거 몰리기 시작했다. [1] 이때문에 종교적 박해를 피해 도망 온 유대인들과 위그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막대한 자금을 들고 와서 금융업에 뛰어들었다. 1609년에 암스테르담에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설립되어 영국과의 국채 거래로만 매년 2500만 길더 이상의 수익을 얻는 등 너무 빨리 돈이 돌자, 금융업자들은 경기과열을 막기 위해 은행을 만들어 다른 사업을 펼쳤다.

얼마 안 지나 네덜란드 전역에 은행과 증권거래소가 들어섰고, 이들은 실물 상품은 물론이고 주식, 외환, 신용대출까지 손을 대기 시작했다. 게다가 스페인의 군사적 위협이 사라지고 독일 지역에서 벌어진 30년 전쟁의 여파로 보헤미아와 체코 등의 직물 산업이 붕괴되자, 네덜란드 업자들은 독점 속에서 호황을 누렸다.





이런저런 사업 덕분에 엄청나게 불어난 자본은 다른 투자대상을 물색하기 시작했고, 이내 눈을 돌린 것이 신비의 꽃인 튤립이었다. 튤립은 원래 유럽에는 없던 꽃이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 주재하던 오스트리아 외교관이 튤립을 선물로 받아 오스트리아 빈으로 가져 왔다. 그 후 플랑드르의 식물학자인 샤를 드 레클루제가 튤립을 손에 넣어 1593년에 레이던 대학의 교수로 임명될 때 가지고 왔다고 한다. 그 전에는 부호나 식물 애호가만이 알고 있던 튤립이 이때 네덜란드에 들어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다고 한다. 단색의 평범한 튤립은 저렴한 가격으로 거래되었지만 희귀한 튤립은 무척 비싸서, 희귀한 튤립의 보유 여부가 부의 척도로 간주되어 부유층들이 앞다퉈 희귀종을 찾았다.

그러니 희귀종을 잘 키우면 돈이 되고, 더욱 아름다운 변종을 만들어 낼 수 있으면 더욱 큰돈을 벌 수 있게 되어, 네덜란드 전역에서 튤립 알뿌리(구근) 확보 전쟁이 일어났다. 게다가 튤립 재배는 작은 나라에서 사는 네덜란드인의 취향과 환경에도 딱 맞았다. 좁은 집에서 주로 살면서 마당 한 모퉁이에 꽃을 키우던 서민들은 튤립을 재배하며 일확천금의 꿈을 키웠다. 당시 잘 나가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주식을 사고는 싶지만 돈이 없던 사람들은 꿩 대신 닭이라는 생각으로 튤립 재배에 모든 것을 걸었다.

변종을 일으킨 튤립일수록 비싼 가격이 매겨지는 가운데 400여 종의 가까운 품종이 개발되었고, 튤립마다 황제, 총독, 제독, 영주, 대장 등의 군대 계급과 비슷한 이름이 붙었다. 서민들에게는 올라버린 가격이 부담스러웠지만 마침 이때 흑사병이 재발해 네덜란드 인구의 8분의 1이 죽자 사람들은 더욱더 격렬하게 투자하기 시작했다. 투자의 대상은 주로 알뿌리였는데, 변형에 변형을 일으킨 특이한 종자나 족보가 확실한 알뿌리는 곧 희귀품이 되었고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636년 내내 오르던 튤립 알뿌리의 가격 상승세는 1637년 1월에 절정에 달했다. 하루에 두세 배씩 오를 때가 있었고 한 달 동안 몇천 퍼센트나 상승하기도 했다. 이때 튤립 알뿌리의 가치는 정말 상상할 수도 없었는데, 1636년 당시 가장 비쌌던 "황제"라는 튤립은 하나에 2500길더였다. 이는 살찐 돼지 8마리, 살찐 황소 4마리, 살찐 양 12마리, 밀 24톤, 와인 2통(240~630리터), 맥주 600리터, 버터 2톤, 치즈 450킬로그램, 은 술잔, 옷감 108킬로그램, 그리고 침대 세트까지, 이 모든 것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위키피디아의 Krelage와 Garber에 따르면 이 목록은 실제 거래 내용이 아니라, 그 당시의 길더의 가치를 보여 주는 목록이다. 물론 엄청난 금액인 것은 틀림이 없는데, 대략 소 1마리가 120길더였다. 금 단위로 따지면 현 가치로 튤립 한 뿌리에 약 2만 5천 달러로 3,000만 원에 달하는 거금이다. 그러니 희귀한 품종의 튤립 가치가 당시 숙련된 장인의 연수입의 10배에 달한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에서 거래된 튤립 알뿌리의 거래 총액을 보면, 1633~1637년 하를렘과 암스테르담에서 거래된 금액이 각각 2,000만 길더어치였다. 다른 10곳의 거래소 규모가 암스테르담의 10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해도 4년동안 네덜란드의 알뿌리 거래 총액은 최소한 4,000만 길더를 넘었다는 것이었다. 매매에 관련된 사람만 수만 명이었고 계약서가 주식처럼 거래되었음을 고려하면 거래 총액은 이보다 훨씬 많았을 수도 있다. 이 거래량이 얼마나 많은지 다른 곳과 비교하자면 암스테르담 은행의 예치금이 350만 길더, 황금알을 낳은 거위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기업체였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최초 투자금이 650만 길더였다.





하지만 이 현상이 오래가지는 못했으며 1637년 2월 5일 갑자기 가격이 하락세로 돌변하기 시작했다. 너도나도 튤립 재배에 뛰어들자 어느덧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사람들이 '단순한 꽃을 이렇게 비싸게 돈 주고 살 필요가 있나?'고 새삼 깨달은 순간에 구매자가 사라졌다. 사실상 폭탄돌리기식으로 계속 진행되었던 튤립의 거래는 알뿌리의 가격이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하자 전체적인 튤립 가격이 도미노 넘어지듯 급격하게 폭락했다.

결국 계속해서 하락세를 기록하면서 4개월 만에 최고점에서 95~99퍼센트가 빠졌고 투자자들은 본전의 1~5퍼센트만 건졌다. 세계 대공황 때 2년동안 75퍼센트가 빠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역사상 최악의 폭락세였다. 금보다 귀했던 튤립 가격이 하루 아침에 휴지 조각으로 되어버린 셈이다.

그 바람에 여기저기에서 어음이 부도났고, 줄소송이 이어졌으며, 채권자와 채무자가 길거리에서 멱살을 잡고 싸우는 등 네덜란드 전체가 난장판이 되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워지자 결국 정부 측에서 1636년 11월을 기점으로 그 이전 계약을 모두 무효로 하고 그 이후에 맺어진 계약에 대해서는 투자자가 생산자에게 계약 금액의 10퍼센트를 물어주는 방안을 냈고, 모두가 그 방안에 합의하기로 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실 튤립 파동은 네덜란드 경제에 끼친 영향은 미미하다. 튤립 파동 이후에도 희귀 튤립 파종은 여전히 고가를 유지하였고 많은 이들이 찾는 품목이었으며, 튤립파동이 다른 산업에 영향을 끼쳤다는 사료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저 몇년전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거성 모바일 사태를 보는 시각처럼, 튤립파동도 일확천금을 꿈꾼 이들의 해프닝성 일화로 알려졌을 뿐이다.

일각에서는 이 튤립 파동 때문에 네덜란드가 크게 타격을 입어 영란전쟁에도 패배하면서 영국에게 경제 대국 자리를 물러주고 쇠락했다고 하는데, 튤립 파동과 영란전쟁은 근 20년 이상의 시간차이가 있고 더욱이 영란전쟁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영란전쟁에서 네덜란드는 (굳이 말하자면) 승리한 쪽이다. 네덜란드의 몰락은 튤립 파동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17세기 황금기를 구가하던 네덜란드에게 이웃국가들이 유럽 특유의 정신 "한놈이 잘나가면 합심해서 때리기"를 발동시켜 그것을 상대하다가 네덜란드의 진이 빠져버렸기 때문이지 튤립 파동이 원인이 된 건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가 막 싹을 트는 시기에 벌어진 일이다 보니 그 전에는 튤립파동만큼 드라마틱하게 전개된 투기붐이 드물었던 탓에, 네덜란드인에게는 칼뱅주의적 금욕정신에 의거한 교훈으로 남았고 전 유럽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나아가 지금까지 무분별한 투기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