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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은 1966년 8월 29일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서 아버지 이병섭과 어머니 배은심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누나 3명이 태어난 다음 태어난 장남이라서 누구보다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광주광역시 에서 보냈다고 한다. 광주동산초등학교, 광주동성중학교, 1985년 광주진흥고등학교(11회)를 졸업했다. 광주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만큼 5.18 민주화 운동 당시 광주에 있었는데 당시 모범생이었던 이한열은 부모님의 말씀대로 집에 가만히 있었다고 한다. 이한열은 나중에서야 진상을 알게 된 후 충격을 받고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이후 1986년 재수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이한열은 경영학과 C반 소속으로 최루탄 피격 당시 입고 있던 티셔츠도 C반 반티였고, 본인도 상당히 마음에 들어 자주 입고 다녔다고 한다.
재학 당시 중앙 동아리인 '만화사랑'을 창설하였으며, 운동권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 동아리는 당시 운동권이 대중과 멀어지자 대학생들을 운동권으로 쉽게 포섭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대놓고 학생운동 서클을 만들면 무사하지 못할 시대였기 때문에, 만화나 음악 등등 명목을 붙여 동아리를 만들고 활동 구심점으로 삼는 사례가 잦았던 탓도 있다. 이한열은 "비록 명목상일지라도 동아리가 '만화 동아리'를 표방하고 있으니, 만화를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부원 중에서 만화를 가장 열심히 배웠다고 한다. 이런 제안에 힘입어 민중 화가를 불러다 그림을 배우기도 했다고 한다.
이한열은 운동권 학생들과 진짜 만화가 좋아서 들어온 학생들 간의 가교 같은 존재였으며,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성실했던 인물이었다. 동기들은 "집회 후 항상 학생회관 휴게실에 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시위를 기록하는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그는 학생운동과 공부 양쪽에서 성실했고, 사상서만큼이나 영어 공부에도 열중했다. 하지만 해당 동아리는 1989년 설인종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난 뒤 운동권과 전혀 무관한 동아리가 되었으며, 이한열 열사 관련 행사 역시 학생회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동아리에서 보관 중이던 사료들은 전부 이한열 기념 사업회에 기증되었다.
1987년 6월 9일 이한열은 '6·10 대회 출정을 위한 범연세인 총궐기 대회'에서 시위대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그날 오후 4시 40분경 학과는 달랐지만, 마찬가지로 '소크'였던 도서관학과 2학년생 이종창은 최루탄을 공격적으로 쏴대는 전투경찰들을 피해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같은 시각 이종창처럼 쫓기고 있었던 이한열 역시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가다가 수평으로 직사된 최루탄에 후두부를 피격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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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루탄을 맞은 이한열을 발견한 이종창은 이한열을 끌어안고 학교로 들어갔다. 이종창은 이한열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며 시위 현장에서 이한열을 부축하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이한열은 계속해서 "뒤통수가 아파. 나 괜찮아?"라고 중얼거렸고, 뛰어온 학생들이 그를 급히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겼으나, 그날 오후 5시 30분에 이한열은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혼수 상태에 빠졌다. 이 때 이한열의 왼쪽 뇌 전체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장례식은 1987년 7월 9일에 '민주국민장'으로 거행되었다. 훗날 더민주 원내대표가 되는 우상호 총학생회장이 민주국민장 집행위원장을 지냈으며, 위 사진에서 보이듯 시위 현장에서 이한열의 영정 사진을 들고 선봉에 서기도 했다. 우현 총학생회 사회부장은 장례식장에서 태극기를 들고 있었다. 연세대학교 본관 → 신촌로터리 → 서울시청 앞 → 광주직할시 5.18묘역의 순으로 이동되며 진행되었는데, 당시 추모 인파는 서울 100만 명, 광주 50만 명 등 전국적으로 총 160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때 문성근의 아버지인 문익환 목사는 아직도 대한민국 현대사의 명연설 중 하나로 꼽히는 연설을 하는데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광주 2천여 영령' + 25명의 열사들의 이름을 부르짖는 것이었다. 이 때의 인연으로 이한열의 어머니인 배은심은 우상호를 친아들처럼 여겨 왔다고 한다.
거의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연설이었으나, 효과는 엄청 났고 소름이 끼친다는 평이 자자한 명연설이다. 유튜브 이한열이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한풀이춤을 추던 서울대학교 이애주 교수(1947~2021) 역시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는데 운구 행렬 이후 서울시청 광장에 남은 100만여 명은 연좌 집회를 열었고, '전두환 퇴진', '청와대 진격'을 외치며 6.29 선언에 주저앉지 말고 전두환 퇴진을 위해 항쟁을 계속하자고 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서울시청에 "조기"를 외치며 조기를 달 것을 요구해 이는 곧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장례위원회, 국민운동본부 지도부,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서대협) 등도 100만 인파가 모인 것을 예측하지 못한 까닭에 군중들은 광화문4가 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광화문4가 쪽을 방어하던 경찰 병력이 다연발 최루탄을 발사하자 결국 군중들은 흩어지고 말았으며 6.10 민주 항쟁은 그것으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