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무환은 1926년에 강원도 울진군 원남면(현 경상북도 울진군 매화면) 매화리에서 출생하여 1948년 조선국방경비대 입대, 1950년 북한 인민의용군 강제 입대, 1952년 대한민국 국군 징집 등을 거쳤고, 1953년 7월 20일 금성 전투(= 금화지구 전투)에 임했다가 포로가 됐다. 이후 포로 교환을 기대했지만 북한 정권의 조작으로 귀순한 것처럼 포장되어 수십 년간 함경북도 온성군의 탄광에서 강제부역을 했으며, 북한 정권의 강제 혼인 정책으로 재혼하여 슬하에 5명의 자녀를 두고 지내다가 1998년 중국을 통해 탈북했다.
가족으로는 부인 박순남(朴順南), 장남 장영욱, 북한의 부인 모씨와 그 슬하의 자녀 5명 등이 있다.
장무환은 해방 이후 1948년 당시 조카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국방경비대에 입대했지만 폐병으로 8개월 만에 의병 제대했다. 그 후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의 기습 침공으로 인해 조선인민군이 그의 고향인 경상북도 울진군까지 점령했고, 결국 그는 반 강제로 조선인민군에 입대하게 된다.
다부동 전투와 영천·신녕전투 등 낙동강 전선을 대한민국 국군이 수호하고 유엔군의 지원으로 인해 인천상륙작전이 시행되면서 그는 부인 박순남과 결혼했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군에서 다시 그를 징집했고 그는 다시 부산에서 대한민국 국군으로 복무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1.4 후퇴와 가평전투가 발생하게 되고 장무환은 동부전선으로 가게 되었다.
정전 회담이 진행 중이던 그때, 동부전선 금성 전투에 나선 일병 장무환은 1953년 7월 20일에 주변에 터진 수류탄에 기절하여 쓰러졌고 이후 중공군의 포로로서 북한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 뒤,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조인됐다.
포로로 잡히고 함경북도 경흥군 아오지 탄광, 온성군 등지로 끌려가서 탄을 캐다가, 1년 뒤인 1954년에서야 포로 교환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낙담했다.
그의 증언에 따른다면 조선인민군은 탄광에서 강제 노동을 하도록 협박했으며, 다치거나 갱도가 무너져 사망해도 방치하는 추태를 보였다고 언급했다. 피복은 1년에 1개 씩 지급할 정도로 개인 위생도 열악했다고 했으며 식량 사정도 열악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조선노동당의 국군포로에 대한 인권 조치는 최악이었다고 하며, 조선노동당은 그에게 강제 결혼을 종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장무환은 어쩔 수 없이 북한에서 한 이혼녀와 재혼을 했고 그 슬하에 5명의 자식과 손자들이 두게 되었다.
장무환은 두만강을 건너 중국 동북3성 지역에서 은신했다. 은신하고 처음으로 주 중국 대한민국 대사관에 전화를 했고, 구출 요청을 했으나 북한 주민으로 등록되었고 사망자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당시 주 중국 대한민국 대사관 직원은 퉁명스럽게 대답했으며, 대화 도중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그 직원은 비난을 받은 직후 "그래서 어쩌라구요"라는 무책임의 끝을 보여주는 전화 답변을 했다.
그러자 가족들이 장무환이 생존해있다는 걸 알고 처음에는 대한민국 국방부, 대한민국 통일부 등 정부기관과 접촉을 했으나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러자 가족들은 민간 단체에 지원을 요청했고, 민간 단체가 수용했다. 한편 이 소식을 알고 있던 SBS <그것이 알고싶다> 팀은 PD 2명과 카메라맨 1명을 꾸려서 중국 현지로 찾아가서 국군포로 장무환의 탈출기를 촬영했다.
탈출하려고 하자 은신처 주인인 중국 대륙 국적의 조선족이 은신처 내 인원들을 캠코더로 촬영하고 1만 달러(당시 환율로 1400만 원 상당)를 주지 않는다면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때 있는 돈을 모두 끌어모아서 2500 달러 정도로 합의를 보고 빠져나왔다.
그렇게 되자 이미 중국에 입국한 가족들은 기차를 타고 가까운 항구 도시로 간 뒤, 인천으로 입국하는 방식으로 계획을 세웠다.
장무환은 철도역까지 이동하면서 자동차를 탑승했으나, 평생 자동차를 타본 적이 없어서 구역질을 하는 등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힘겨운 이동 끝에 역에 도착했다.
중국의 철도역에는 공안원들이 배치되고 북한이탈주민에게 말을 시킨 후 강제 북송을 한다는 것을 알게된 가족들은 먼저 말을 하지 않도록 계획을 짰고, 4시 기차 시간에 일찍 가면 공안원들이 수시로 움직이면서 북한이탈주민들에게 말을 걸어 강제 북송을 할 가능성이 높으니 3시 55분 즈음에 철도역에 도착하기로 했다.
결국 기차를 타고 항구 도시에 도착했으나 장무환의 여권이 없는 까닭에 가족 분들이 먼저 귀국했고 장무환이 잠시 항구 도시에서 은신하기로 했다.
장무환의 가족들이 먼저 귀국한 이후 장무환의 조카 장영웅은 어떤 남성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남서울호텔(현재의 '르메르디앙호텔')로 향했고, 거기서 신원을 밝히지 않은 검은 정장의 남성으로부터 장무환의 여권을 받았다.
여권을 받은 이후 다시 그 항구 도시로 갔다. 장무환 역시 출국하게 되었으나 공안원이 여권에 출입국 도장이 없다는 이유로 출국을 불허하려고 했으나 아들과 조카가 "입국한 공항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 국가이민관리국에서 도장을 찍어주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30여 분간의 실랑이가 이어졌고 뒤에서 항의하던 여객들의 눈치가 보였던 공안원이 승복하고 도장을 찍어주면서 상황이 종료됐다.
1998년 9월 30일 인천항을 통해 48년 만에 대한민국으로 귀환했다. 1998년 10월 29일에는 제3보병사단에서 면역 신고를 했고, 경상북도 울진군의 본가로 돌아가서 부인 박순남, 아들 장영욱, 형제자매, 조카들 등과 재회하고 여생을 보냈다.
2021년 5월 15일에 방영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그가 돌아온 후의 이야기도 함께 다뤘다.
부인 박순남은 그와 10년 이상 행복하게 살다가 2012년에 사망했고, 장무환은 가끔씩 꿈 속에서 북한에 남은 가족들을 만나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2015년에 세상을 떴다고 한다. 그야말로 그는 역사적 비극으로 인해 남쪽에도 북쪽에도 다리를 걸친 채 회색인의 삶을 살다 간 것.
아들 장영욱은 아버지를 배려하여 어머니 박순남뿐만 아니라 북한에 살고 있는 아내 모씨와 이복동생들의 이름들도 아버지 묘비명에 새겨두었다.
이 사건이 있은지 이미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서 아들 장영욱과 조카 장영웅의 모습도 완연한 노인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