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천하를 지배했던 '서태후' 사치의 끝판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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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천하를 지배했던 '서태후' 사치의 끝판왕

서태후는 본래 의귀비란 직첩을 받은 후궁이었지만,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 동치제를 낳자 후계자의 생모로서 황후에 준하는 지위를 얻었다. 그 후 함풍제가 1861년 사망하면서 아들 동치제가 6세 나이로 즉위하자, 함풍제의 정실 황후인 동태후(효정현황후)와 같이 섭정을 행하면서 권력을 잡았다. 서태후는 후궁이지만 동치제의 생모이기에 성모황태후가 되었고, 동태후는 함풍제의 황후이므로 모후황태후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자체는 서태후가 부린 억지가 아니라 청 황조에서 본래부터 존재한 규정이다. 청나라 황실에선 후궁의 아들이 황제에 즉위하면 선황의 정실 황후는 모후황태후, 황제의 생모인 후궁은 성모 황태후가 될 수 있었다. 물론 같은 태후라 할지라도 모후황태후인 동태후가 지위도 높고 법적 정당성이나 명령의 권위 또한 더 높았다.

 



실질적인 권력은 대부분 권력욕이 있었던 서태후가 가지고 있었다고 하나, 두 태후 간의 알력 다툼은 피할 수 없었다. 정작 동치제는 엄격하게 대하는 서태후보다는 온화한 성품인 동태후를 더 좋아했다고.

이런 알력다툼은 자그만치 20년을 갔다. 그러나 동태후가 1881년 어느 날 계단을 내려가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뇌진탕으로 사망하면서 권력을 완전히 서태후가 장악했다. 동태후의 죽음을 두고 서태후가 손을 써서 암살을 했다는 음모론도 있었으나 공식적으로는 뇌진탕으로 인한 병사가 맞는다.

두 태후 외에도 황실의 어른으로서 정치에 관여하고 있던 공친왕(함풍제의 동생) 때문에 청 황실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동치제가 장성하여 친정을 시도하자 이번엔 모자간의 갈등이 벌어졌다. 이는 서태후가 매우 엄격하여 모자간 사이가 멀어진 탓도 컸다. 이런 혼란이 계속되는 가운데 동치제는 19세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동치제~광서제 연간에는 양무운동이 진행되었다. 서태후 본인도 청나라의 정신은 그대로 간직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이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지만 결과는 뭐... 청일전쟁에서 다 나온다.

그러나 양무개혁 당시 군함을 살 돈을 서태후가 유용하여 베이징에서 유명한 이화원을 지었다는 말은 근거가 부족하다. 정확히 말해서 그 돈은 다시 메워졌기 때문이다.(더구나 이화원은 청이 아직 쇠하지 않았음을 보이는 과시용 건축이기도 했다.) 하지만 영국에서 신식군함 2척을 사라고 제의했을 때 청국은 서태후의 생일비용 때문에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 2척은 일본에 팔렸고 그중 1척이 청일전쟁 때 맹활약한 요시노(吉野)였다. 전함 2척, 곧 정원(定遠), 진원(鎮遠)을 도입하여 정원을 함대 총기함으로 삼았으나, 주포 포탄의 구입비용을 생일비용 때문에 조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청일전쟁의 패배 원인은 지휘관의 삽질 때문이고, 청나라 해군의 전력은 분명 규모면에서 매우 거대했다지만, 이를 관리하고 증강하는 비용을 제대로 투자하지 않은 것 역시 패전의 중요 이유였다. 포탄이 부족하다고 안에 화약 대신 엉뚱한 콩 따위나 넣어 관리비를 줄이고 훈련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고 기강까지 해이한 군대가 전쟁에서 이길 가능성은 없다시피 하다.

동치제 사후 1875년 순친왕과 자신의 여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즉 동치제의 사촌동생이자 자신의 조카뻘인 아이를 양자로 들여 즉위시켰는데, 이 사람이 광서제다. 당시 황제는 4살 정도에 불과했기에 서태후가 다시 섭정을 했다. 순친왕은 서태후에게 설설 기었다. 1881년에는 동태후가 급사하였는데 암살되었다는 추측이 있으나 증거는 없다. 이후 광서제가 16세가 되면서 명목상 친정을 시작했지만 서태후는 물러나지 않았고, 고로 정권은 여전히 서태후 손 안에 있었다.





광서제는 캉유웨이와 같은 젊은 사상가들을 곁에 두었고, 이들은 변법자강운동을 통해서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비롯한 근대적인 개혁을 꿈꾸었다. 그러나 광서제가 자신의 군대를 가지려고 하자 처음에는 그를 지지하던 서태후가 곧 지지를 철회했다. 변법파는 반발하여 서태후를 제거하려고 했고, 위안스카이는 변법파를 배신하여 이를 서태후에게 알렸다. 서태후는 자신을 따르던 청 왕조의 보수파들과 함께 무술정변을 일으켜서 광서제를 유폐하고 그를 따르던 변법파들을 대거 숙청, 결국 변법자강운동은 100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개혁세력은 그저 황제와 측근들이 이런저런 법안을 제정하고 공표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줄 알았지만, 청나라의 행정이 이를 소화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또한 당시 청나라는 18~19세기에 인구가 폭증했지만 행정력이 이를 따라가지 못해 행정공백이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소위 '개혁'에 성공하기란 불가능했다.

덧붙여 광서제는 어린 시절 부모와 헤어져 황제 교육을 받았고, 엄격한 서태후에게 눌린 탓인지 자기 의지를 강하게 밀고 나가지 못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한 예로 후궁을 들일 때마저도 자신이 원하는 여자와 서태후가 권하는 여자가 다르자 잠시 고민하다가 말 없이 고르기로 한 후궁 전부를 서태후가 권하는 여자들로 들였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광서제 항목을 보면 꼭 그런 건 아닌 것 같다. 어디까지나 야사인 듯. 여하간 서태후는 자식 농사는 완전 수준 미달이었다.

반외세 운동단체인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서태후는 이들을 살살 구슬려서 청나라를 부흥시켜 서양 오랑캐들을 몰아내자는 부청멸양(扶淸滅洋)으로 구호를 바꾸게 했다. 이후 서양 열강들이 자신을 몰아내고 광서제를 복귀시키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선전포고를 했다가, 헛소문임이 밝혀지자 부랴부랴 취소했다. 하지만 이미 성질이 뻗친 열강들은 8개국 연합국으로 베이징을 점령했으며, 서태후는 시안까지 도주했다가 불평등조약 크리.





어떤 정적도 두렵지 않던 철의 여인 서태후도 이겨내지 못할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세월이었다. 노쇠해졌어도 여전히 극심한 사치와 향락을 즐겼는데 이것이 독이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며칠 간 계속되는 만한전석 형식으로 연 본인 생일잔치에서 과식한 뒤 서태후는 이질에 걸렸다. 그보다 며칠 앞서 10년 간 유폐되었던 광서제는 1908년 11월 14일 누군가 보낸 독약을 먹고 38세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훗날 21세기에 광서제의 유해를 확인하기 전까지 광서제의 독살은 병사로 은폐되었다.

황실을 조종하던 서태후가 광서제를 직접 독살했거나 혹은 독살에 동참했을 수 있다. 서태후는 조카인 광서제의 죽음을 전해듣고도 매우 담담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즉시 독단으로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의 불과 세 살 밖에 안 된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했다.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였다.

거기에 최근에 밝혀진 바로는 광서제가 사망하기 전날 이미 푸이를 궁궐로 데려오고 순친왕을 섭정으로 세우라는 유지를 광서제의 이름으로 반포했다고 한다. 당시 광서제가 서태후의 허수아비였음을 생각하면, 서태후는 이미 광서제의 죽음을 기정사실화하고 후계자 선정을 공식화한 셈이다. 반대로 같은 날 광서제 본인은 치료를 위해 전국에 의사를 구하는 유지를 내렸으므로 광서제의 병세가 절망적이진 않았다. 적어도 죽음을 준비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실제로 후대에 시신을 조사해본 결과 독극물인 비소가 다량 검출되어서 사인이 독살로 확인되었는데. 이를 종합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의심한 대로, 서태후가 광서제 독살을 직접 지시한 것으로 보인다.

세 살짜리 푸이를 선택했을 때 서태후는 곧 병을 털고 일어나 수렴청정을 이어갈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령은 이질을 이기지 못했고 서태후는 광서제가 죽은 다음날인 1908년 11월 15일 그토록 핍박했던 조카를 따라 생을 마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서태후의 유언은 다시는 나처럼 여인이 정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였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는 멸망했다.

노쇠하였지만 7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으니 당시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상당히 장수한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일각에서는 서태후도 위안스카이에게 암살당했다고 주장한다.






이화원에 있는 호수에서 뱃놀이를 즐기는 모습



서태후는 사치스러운 생활로 유명하다. 정치에서 최고 권력을 가졌던 서태후였던 만큼 어마어마한 사치를 즐겼다고 한다. 우선 진귀한 음식에 관심도 많고 식탐 또한 대단했는데 한 끼에 128가지나 되는 음식을 먹었는데 당시 돈으로 환산하면 100냥이었다. 이것은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 치 끼니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농민 1천여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를 현대의 물가로 환산하면 2000년 전후의 한국을 기준으로 약 8천만 원 정도다. 그리고 절대 같은 음식을 3번 이상 먹지 않았다. 어떤 때는 관상용으로 호화스런 음식을 가득 차려서 따로 내놓기도 했었다. 오리고기, 돼지고기 등 육식을 무척 좋아했고 서태후가 전용열차를 타고 지방에 가는 날이면 16칸 열차에서 4칸이 주방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서태후의 식사 준비를 수행하는 요리사만 50~100여 명이나 되었다. 그것도 각종 허드렛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빼놓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노년에는 자신의 미용을 위해 날마다 산모들을 처소까지 불러서 신선한 모유를 매일같이 마셨고 한다. 이때 산모는 무릎을 꿇은 채 서태후에게 젖을 물려야 했는데, 이는 서태후 본인의 존엄성이 훼손됨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화원에 거주할 때도 전화를 설치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가관. 바로 자신과 통화하는 상대방이 건방지게 누워서 통화하는지 무릎을 꿇고 통화하는지 알수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서태후의 운전기사도 예외가 아니라서 무릎을 비스듬히 꿇고 차를 운전해야만 했기 때문에 서태후가 탄 차는 늘 잔사고가 많았다고 한다. 사실 저런식의 자동차 운전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시의 운전 방법은 현대의 자동차와 운전방법이 달랐기 때문이다. 





옷은 3천여 벌이나 되어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고 다녔다. 보석을 좋아하여 애착이 대단했다. 언제나 비취와 진주로 머리 장식을 했고 비취 구슬과 진주를 매단 옷을 입었으며, 비취로 만든 팔찌와 반지뿐 아니라 손톱에까지 비취 보호판을 달았다. 식탁도 비취로 만든 식기들로 차리게 했고, 비취로 악기를 만들어 연주하게 하였다. 버선과 신발에도 굉장히 신경을 썼는데, 아무리 예쁜 버선과 신발이라도 한 번 신고 나면 다시는 신지 않았다. 서태후의 버선과 신발을 만드는 데만 매년 3천 명 가량이 동원되었고, 그 비용은 매년 1만 냥 정도가 들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서태후는 중국에서 아직까지도 여후, 측천무후(또는 가남풍) 등과 함께 중국 역사상의 3대 악녀 중 하나로 꼽힌다.) 이게 청나라 황실에 할당된 예산 하에서 이루어진, 원래 쓰던 정도의 사치라는 얘기도 있지만 나라가 망국지란의 위기에 있는데 이런 사치를 부림은 좋게 볼 수 없는 게 사실. 밑에서 설명할 이화원 문제만 봐도 그러하다.

그럼에도 서태후는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던 청나라의 마지막 버팀목이기도 했다. 사실 서태후가 문제가 많은 인물이고 서태후 생전에 청나라가 불안불안하며 무력했지만, 서태후라는 강력한 구심점이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는 허약할지언정 분열되지는 않았다. 또한 양무운동과 동치중흥을 있게 한 것은 서태후 덕분이다. 서태후는 인권(특히 여성인권)과 교육, 전족 등 악습을 폐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서양 문물에도 거부감이 없었다. 특히 황실의 웃어른이었기 때문에 서태후가 시작하면서 유행하거나 알려진 패션 등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게다가 사치와 정치적인 면과는 별개로 당대 청나라 백성들에게는 많은 존경을 받은 모양이다. 서태후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쓴 펄 벅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골 농촌 같은 곳에서는 서태후가 아직도 살아있는 줄 알고 있었다고. 서태후가 사망한 지 수십 년이 지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농부들은 '이제 우리를 누가 돌봐줄 것인가?'라고 외쳤다고 한다.

의화단 운동으로 피난 생활을 할 때의 야사로, 피난 생활로 인해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서태후 일행이 곤란을 겪자 청나라 백성들이 평소 먹던 옥수수 빵을 바쳤고 허기에 지친 서태후는 이를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이후 자금성으로 돌아온 뒤 서태후는 그 맛을 떠올려서 황실 요리사들에게 옥수수 빵을 만들어 올리라고 했다. 하지만 피난 시절 때 허기진 채 먹었던 그 맛이 나올 리 없었다. 궁리 끝에 요리사들은 원래의 옥수수 빵에다 견과류와 설탕을 넣어 맛을 더한 음식을 만들어 바쳤고 그제야 서태후가 만족했다는 이야기다. 이 옥수수 빵이 중국에서 흔히 먹는 워워터우(窝窝頭)라고 한다. 선조와 도루묵 이야기를 연상하게 하는 이야기. 하지만 해당 음식이 명나라 시절의 기록에도 언급되었다는 주장이 있고 더불어 비슷한 이야기는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에게도 있는지라 진실은 저 너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