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2월 24일 호눌룰루에서 이륙해서 뉴질랜드 오클랜드 공항으로 가던 811편은 이륙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평양 상공에서 갑작스럽게 커다란 폭발음과 함께 동체의 일부분이 부서저 나가고, 이후 비즈니스석 바닥이 무너지면서 일부 좌석이 승객과 함께 통째로 기체 바깥으로 떨어져 나갔으며, 곧이어 오른쪽 두 엔진에 동시에 화재가 발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이후 심각한 감압 상태에서 승객들은 어두운 바다와 함께 비행기가 분해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빠지게 되었고 기장은 호놀룰루로 회항하기로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숙련된 배테랑 조종사들 덕분에 다행히 811편은 호놀룰루에 안전하게 착륙에 성공했다. 그러나...
착륙 이후 충격적인 사실에 직면한다. 그것은 비즈니스석 G-H 열까지 창가쪽 좌석에 탑승했던 승객들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좌석이 있던 곳에는 잔해밖에 남지 않았다. 결국 잔해가 있던 곳에 탑승했던 9명의 승객들은 실종 및 사망으로 처리되었다. 착륙 이후 해당 항공기의 엔진에서 인체 조직이 발견되었는데, 이 승객들 중 일부는 동체 일부분이 상실되면서 사실상 엔진 안으로 빨려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고는 미국 전체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1974년 3월 3일에 있었던 터키항공 981편이 화물칸의 도어가 뜯겨나가 모든 유압을 잃고 파리 근교의 숲에 추락하여 346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일이 다시 재발할 뻔한 사고였기 때문이었다.
그 중 9명의 사망자 명단에 들어간 리 캠프벨(Lee Campbell, 사건 당시 24세)의 부모님 케빈 캠프벨(Kevin Campbell, 아버지), 수잔 켐프벨(Susan Campbell, 어머니) 부부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조사했다.
사고 2달 뒤, 켐프벨 부부는 NTSB 사고 공청회에서 자료를 몰래 빼내거나 조사단과 인터뷰 하는 등 3년이 넘도록 개인적인 조사를 해서 747의 화물칸 도어의 문제점을 폭로한 후에야 사고의 진상이 밝혀졌다.
보잉의 설계에는 747의 바깥으로 열리는 화물칸 도어의 전기적 오작동에도 열림을 방지하기 위해 알루미늄 재질의 얇은 안전장치가 존재했다. 하지만 1975년 이미 이 안전장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알루미늄 재질의 열림방지장치를 두껍게 보강했다. 하지만 이 사고 2년 전인 1987년, 같은 747 기종인 팬 아메리칸 항공 125편 감압 사고 이후 보잉은 이 알루미늄제 열림 방지 장치가 무용지물이란 걸 깨닫고 철제로 변경하도록 정비회보를 띄웠다. 당시 이 정비회보는 강제적이 아니었고 FAA는 미국 항공사의 747 화물칸 도어 열림방지장치 교체작업(알루미늄 → 철제)에 18~24개월의 여유를 줬고, 이에 따라 유나이티드 항공은 24개월을 들여 느긋하게 교체하려다 사고가 터진 것.
FAA은 811편 사고의 진상이 밝혀진 후에야 30일 이내에 철제 열림방지장치로 교체작업을 완료하도록 만들었다.
이후 보잉은 화물칸 도어의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고 FAA의 강제 항공기 리콜이 이뤄진 다음에야 더이상 이런 사고가 벌어지지 않게 되었다.
항공 사고 수사대에서 시즌 1 에피소드 2로 다루었고 '하늘에서 뜯겨나가다', '잠겨지지 않은 재앙', '재앙의 씨앗'으로 방영되었다.
해당 항공기는 사고 이후 6개월간 수리를 거친 뒤 N4724U로 재등록된 채로 유나이티드 항공에서 8년간 더 굴려졌다. 이후 감비아의 한 항공사에 넘겨졌다가 2001년에 미국의 한 공항에 버려진 뒤 2004년에서야 폐기처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