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자 신드롬 레전드 '신창원 탈옥'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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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회.정치.역사.인물

범죄자 신드롬 레전드 '신창원 탈옥' 사건

 

신창원은 1994년 부산교도소로 이감되어 복역하다 1997년 1월 탈옥을 저질렀다. 노역 작업 도중 손에 넣은 작은 실톱날 조각으로 하루 20분씩 무려 2개월간 들키지 않도록 화장실 쇠창살을 몰래 조금씩 그어 마침내 지름 1.5cm의 쇠창살 2개를 끊었고, 감방을 빠져나와서 외벽 환기통을 타고 1층으로 내려왔다. 끊은 쇠창살로 20m 가량 떨어진 교도소 내 교회 신축공사장 철담장 밑의 언 땅을 폭 53cm 깊이 20cm 가량 파내어 공사장으로 들어간 후, 공사장에서 주운 밧줄을 타고 외부로 통하는 공사장 펜스를 넘어 교도소를 빠져나갔다.

당시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하던 부산교도소를 빠져나가는 데에는 1시간 3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사전에 동료 죄수들을 포섭했다거나 심지어 교도소의 묵인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설이 제기될 정도로 신출귀몰한 탈출이었다. 이 탈옥을 위해 좁은 곳을 지나가기 쉽도록 15kg을 감량하였고, 신뢰를 쌓아 감시를 줄이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모범수로 지냈다고 한다. 교도소를 빠져 나간 신창원은 500m 떨어진 화훼 농가로 침입하여 옷을 훔쳐 입고 자전거를 훔쳐 4km를 달려 구포사거리까지 간 뒤, 택시를 타고 서울로 잠입했다.

그 뒤 2년 6개월간 4만여km 거리의 도주를 계속하였으며, 도주를 다니는 동안 빈집들을 털며 훔친 현금으로 생활했고 이동도 훔친 차를 활용했다. 그렇게 도망다니는 동안 잡힐 듯 하면서도 체포 직전에 경찰관들의 추격을 따돌린 것만 무려 6번이었다. 연 97만 여명의 경찰이 동원되었고, 전국 6개 지역 지방 경찰청에 수사 본부가 설치되는 등 거의 전국을 돌아다니며 도주 행각을 벌였다. 그 중 유독 천안시 근처에 자주 출몰했기 때문에 천안 시내 이곳저곳마다 경찰 병력이 배치되고 차량 검문이 실시되었으며 천안 시민들이 공포에 떨어야 했다. 천안 이외에도 지나간 곳이 많아 곳곳마다 해당 지역 경찰서 높으신 분들이 불명예 퇴직을 당했다. 당시 신창원 검거 실패로 징계받은 경찰관들은 29명, 총경 이상만 10명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 복무하던 전의경과 경교대원들에게도 악몽으로 기억되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과 마찬가지로 경찰관의 진급 정체를 해소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또한 이 때 진급한 김석기 등이 나중에 서울특별시경찰청장까지 승진하게 된다.

이리하여 신창원은 방송을 타며 전국구급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면서, 현상금이 1,000만원에서 5,000만원으로 올라갔다. 이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사상 최고액 현상금이었다.

1999년 당시 5,000만원은 단순 소비자물가지수 가치환산으로도 2018년 기준으로 약 8,000만원이며, 최저임금으로 산정해 보면 1999년 최저임금은 시급 1,600원이므로 시급이 7,530원인 2018년에는 약 2억 3,500만원이고 당시는 대치 은마아파트 35평이 1억 5천만원에 매매되던 시절이니 엄청나게 큰 현상금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별의 별 천태만상들이 나왔는데, 신창원이 나타난다는 사전 정보를 입수하고도 저 혼자 공 세우려고 단독으로 검거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징계를 받은 형사가 있는가 하면 잠복근무를 하던 형사가 신창원 동거녀를 성폭행하여 결국 파면되고 구속되는 사건도 있었다. 이는 신창원이 도주 중일 때 쓴 일기장에 언급되면서 알려졌다. 신창원과 만난 동거녀가 울면서 그의 뺨을 때리며 "너 때문에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 줄 아느냐"며 폭로했다고 한다. 신창원은 너무 미안해서 아무말도 못하고 동거녀가 연거푸 뺨을 치는 것을 그저 맞고 있었다고 일기에 기록했다.



신창원과 관련된 신고를 받고 천신만고 끝에 검거했는데 알고 보니 신창원을 사칭한 강도범인 경우도 있었다. 가장 압권은 시민의 신고로 검거된 상태에서 경찰관의 부주의로 놓친 일이 있었는데, 이걸 가지고 현상금 못 주겠다고 경찰 측에서 땡깡을 부려 신고자가 소송을 내고 대법원까지 끌고가 결국 5,000만원을 다 받아냈다. 이리하여 신창원 현상금은 2번 지급되었다.

거기에 신창원은 경찰관의 DP52에 맞았는데도 기어코 도망을 가고, 경찰관과의 격투 중 부러진 뼈를 혼자 맞추기도 했다. 추격이 심할 땐 쥐를 잡아먹으면서 박스 안에서 일주일 넘게 은신하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그는 문신이 있다. 아무리 별의 별 변장을 해도 문신을 지울 수 없으니 그는 문신을 가리고자 한여름에도 긴팔 티셔츠를 입고 자주 활보했다고 한다. 이는 그의 결정적 단서를 확보하는 데 쓰였다.

신창원 곁에는 늘 여자가 있었다. 검거당시 신창원은 전북 익산시 은하수카페 종업원 김모 양과 동거하며 결혼을 약속했다. 6월 29일 김 양은 전남 순천시에 내려가 대주파크빌을 계약하고 다음날부터 곧장 살림을 시작했다. 신창원은 이 때 김 양에게 돈다발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나를 배신하지 말라"고 위협하는 등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7월 16일 신창원이 검거되자, 김 양은 이러한 사정을 털어놓으며 "아파트는 내 이름으로 계약했으니 빼앗지 말아달라."라고 경찰관에게 사정했다. 김 양에게 중요한 것은 신창원과의 사랑이 아니라 돈이었던 것. 결국, 신창원은 자신을 숨겨줄 여자가 필요했고 여자는 돈이 필요해서 이해관계가 떨어진 것이 '신창원의 여복'이었던 셈이다. 물론 신창원도 여자들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도피처로 이용했던 것이기에 서로 각자의 이익을 위한 필요관계에 불과했던 것.



1999년 7월 16일 전라남도 순천시 금당 대주아파트 104동 205호에서 가스레인지 수리공 김영군은 당시 우연히 의뢰 받은 집을 수리하다가 신창원을 보았는데, 집 내부에는 의미심장하게 운동기구들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신창원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집에 다시 들어가 남자의 얼굴을 확인했으며, 경찰서에 신고 한 뒤 근처 부동산에 가서 그 집이 여자의 명의로 된 건지 확인까지 했다고 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집을 계약한 다음날 바로 입주했음을 안 뒤 신창원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대개 이사하려면 계약하고 며칠 뒤 돈을 주고 들어오는 게 보통이기 때문.



오후 3시 40분경에 수리공의 신고로 경찰 46명이 출동하여 이들에게 둘러싸인 신창원은 5시 20분경, 뒷베란다를 통해 들어온 경관 3명에게 검거됐다. 검거될 당시 입었던 미쏘니 니트 셔츠가 화제가 되어 한때 저 딱 달라붙는 티셔츠가 '신창원 티셔츠' 라며 유행하기도 했다. 검거된 뒤 징역 22년 6개월이 추가되었고 원래 있던 부산교도소에서 흉악범을 가둬두는 경북북부교도소로 이감되어 2.6m2의 독방에 수감되었다. 신고자 김영군은 포상금 5000만원과 더불어 경찰에 특채되었고, 지금도 경찰로 근무하고 있다. 검거 당시 심경을 묻는 기자들에게 신창원은 덤덤하게 "편해요 그냥."이라며 모든 것을 체념한 듯 교도소로 향했다.



세월이 많이 흐르면서 유영철, 강호순, 정남규, 정두영, 조두순, 오원춘, 김성수, 김태현 등 온갖 흉악범들이 등장하자 신창원 탈옥 사건의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그 선두 주자는 표창원으로 그의 요지는 한 마디로 "신창원이 잘못한 건 잘못한 거 맞는데 법원이 처벌을 그렇게 감정적으로 하면 되나? 그 조두순도 12년 형밖에 못 받았는데 도망 잘 쳤다는 이유로 22년 6개월이나 증형하는 짓이 타당한가?"로 정리할 수 있다. 물론 상기되었듯 범죄자인 신창원이 잘 했다는 게 아니라, 그저 경찰의 허점을 잘 노리고 도망을 오래 쳤으니 무능한 경찰관들 또한 반성할 일인데도 그들이 반성하기는커녕 신창원에게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막무가내식 엄벌을 내린다는 것은 '도망을 잘 친 네가 나빠'라고 하며 괘씸죄로 책임을 전가하는 꼴 아니냐는 의견이다.

게다가 위에서도 전술했듯, 탈옥 사건 이후로도 수감 생활 도중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학업에 정진하면서 세상을 더욱 놀라게 했다는 점을 보면 모범적으로 수감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다른 범죄자들과는 달리 신창원에게만큼은 더더욱 동정과 안타깝다는 의견들이 대다수며, 그의 유년 시절 어른들의 따뜻한 보살핌이 있었으면 그의 삶이 달라졌을 거라는 의견들과 심지어는 가석방으로 풀어주면서 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일부 의견도 있다.

다만 비판론자들은 밀레니엄을 전후한 시대와 2010년대의 시대 상이 다르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2010년대보다 형량을 가혹하게 선고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이걸 2010년대 시각에서 평하는 게 무리가 있다는 것. 당시 신문 기사를 봐도 강도 사실이 밝혀지면 최대 사형에 아니면 징역 22년 6월 수준으로 나올 것으로 예상했다.



결정적으로 어차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인지라 사형 집행을 직접 받은 사람이 아니면 추가 형량을 얼마나 선고하든 실질적으로 유의미한 것도 아니다. 다만 만약 탈옥하지 않은 채 20년간 모범수로 잘 생활했으면 2010년대쯤에 무기수 가석방을 받을 가능성 정도는 있었을 것인데 탈옥 때문에 이는 물 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