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최재형'의 4대 후손 '박엘레나' 나눔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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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최재형'의 4대 후손 '박엘레나' 나눔의료


2020. 12. 4.

최재형은 러시아의 시베리아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러시아식 이름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이며, 이명은 최재형, 최도헌, 별명은 최 뻬치카, 최 비집게가 있다.


망국 전후 연해주 독립 운동은 최재형을 빼놓고서는 기록할 수 없다. 그 정도로 러시아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중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던 인재였다. 안타깝게도 연구가 부족한 과거에는 그리 조명받지 못해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알게 되었다. 현재도 전공 학생이나 역사에 관심이 아주 깊지 않은 이상 지명도가 크게 떨어지는 인물. 한반도, 만주, 관내 지방이 아닌 러시아와 연해주의 연구 자료가 크게 부족한 것과 필시적으로 얽히게 되는 사회주의와의 연관성으로 인해 관심이 적은 것이 크다. 그렇지만 무장 투쟁 운동에서 김원봉, 관내 독립 운동에서 김구, 교육 운동에서 안창호를 빼놓을 수 없듯이 러시아와 연해주 독립 운동 역사에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최재형은 1860년대 말 최초의 고려인 이민자로서 함경북도 경원군의 노비 출신이었다. 최재형은 러시아 상선 선장의 도움으로 러시아에서 교육받은 최초 고려인이기도 했다. 하급 선원, 무기 공장 노동자 등 각고의 노력 끝에 1900년대 초 러일전쟁으로 인한 특수로 군수 산업 분야에서 큰 돈을 벌어 서른 살이 되기도 전에 연해주 굴지의 거부가 되었다.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성실하고 유능해 많은 러시아인이 최재형에게 통역, 도로·막사 공사 하청, 식료품 등 군납을 맡겼다고 한다.

최재형은 자신의 재산과 능력과 기회를 공동체에 바치면서 한인에게 존경받는 남자였다고 한다. 내륙의 한인에겐 소, 돼지, 닭 등을 길러 군납 가능하게끔 했고 슬라뱐카 등 해안가 한인에게는 연어를 잡아 살과 알을 납품하도록 했다. 마을에는 학교와 공원을 세웠다. 그런 최재형을 러시아 정부는 도헌 즉 지방정부 시장으로 추천했고 연추 읍민들은 쌍수로 환영했다. 한인이 최재형를 어찌나 존경하고 따랐는지 1907년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은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기억했다.

동포의 권익 뿐만 아니라 조선의 독립을 위해 최재형은 물심양면 상해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 특히 무장 투쟁의 정신상 지주이자 자금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08년 최재형은 국외 최대 독립운동단체인 동의회를 세우고 총장으로 취임했다. 동의회는 최재형이 내놓은 13,000루블, 이위종의 부친(前 러시아 공사 이범진)이 전해온 10,000루블, 최재형과 안중근이 모금한 6,000루블을 기금으로, 6월 총대장 이범윤에 안중근을 참모 중장으로 한 연추 의병을 창설했다. 연추 의병은 7월부터 국내의 홍범도부대 등과 연합작전을 펼쳐 접경 지역의 일본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러나 9월 안중근의 실수로 영산 전투에서 대패했다.

영산 전투에서의 대패 이후 최재형은 재정난 탓에 폐간되었던 〈大東共報(대동공보)〉를 인수해 재발행해 격렬한 논조로써 일본제국을 비판하고 한인에게 독립 의식을 고취하였다. 안중근도 여기에서 근무하면서 때를 기다리도록 했다. 1909년 10월, 안중근과의 이토 히로부미 살해 거사도 최재형의 후원으로 성사됐다. 이것을 두고 안중근이 자신의 상관이자 조선 8도 독립운동을 총괄한다고 주장한 김두성이 이 사람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다.

조선의 병탄 이후 러시아는 항일 운동을 더욱 강하게 탄압했고 〈대동공보〉도 폐지되었다. 당시 연해주는 망명한 독립 지사의 집결지였는데 최재형은 점진다운, 온건 투쟁 노선을 취하면서 이 韓人들과 연해주 한인을 망라한 단체를 조직했다. 한인 동포에게 실업을 권장하고 일자리를 소개하면서 교육 보급을 표방한 권업회였다. 회장 최재형, 부회장 홍범도 체제로 출범한 권업회는 1914년 강제로 해산될 때 회원이 8,579명에 이르렀다.

1917년 10월혁명으로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최재형은 또 선택해야 했다. 최재형에겐 조국 조선만 있을 뿐 이념이 없었다. 일본제국 이 반혁명군을 지원했으므로 그들에 대항하고자 혁명군과 함께 싸우길 택했다. 1918년 10월 말, 한인 사회당 간부인 이동휘, 김립, 이인섭은 하바로브스크에서 피신해 와서 니콜스크 - 우수리스크 동측인 한인 농촌에서 회합하였다. 당시 홍범도는 솔밭관 최의관 집에 머물렀는데 이 남자들은 홍범도를 지도자로 해서 빨치산 부대를 조직했다. 이 계획을 추친하고자 한인 사회를 지도한 최재형, 김이직, 엄주필 같은 남자들에게 몰래 찾아가 자금 지원을 요청해 그 남자들은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런 적극 지원은 일본군의 첩보에 걸렸고 이 탓에 최재형은 일제 당국의 주요한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19년 망국 이후 신한촌에서 가장 먼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대한국민회의'라는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상해임시정부보다 한 달 빠른 시점!) 그 대표는 헤이그 밀사의 일원이었던 이상설이었고 이 가장 먼저 설립된 임시정부인 해삼위대한국민회의를 재정상 지도했던 남자도 최재형이다. 그 남자는 1920년 청산리 전투과 봉오동 전투에 참여한 독립군들에게 체코제와 러시아제 기관총 등 무기를 구매해 공급하면서 승리를 견인하기도 했다.

일본군은 1920년 우수리스크를 급습, 연해주 4월 참변을 일으키면서 최재형을 제일 먼저 즉결 처형했다. 최재형은 피신 가능했으나 피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사라지면 가족이 고통당할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엄마와 언니들은 아빠에게 빨치산 부대로 도망하라고 했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내가 도망하면 너희 모두 일본군 당국에 끌려가 고문당할 것이다. 나는 살아갈 날이 조금 남았으니 죽어도 좋다! 너희는 더 살아야 한다.’ … 다음날 새벽 열린 창문으로 일본군 당국에 끌려가는 아빠의 뒷모습이 보였다.”(다섯째 딸 올가의 회상) 최재형은 왕바실재 산기슭에서 동지 김이직과 엄주필 등과 함께 처형됐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우수리스크에 위치한 독립운동가 최재형의 옛 집이 독립운동기념관으로 지정되었다.

가족은 두번째 아내 엘레나 외에도 자녀로 4남(표트르, 파벨(1900년생), 발렌틴(1908년생), 비켄티(1914년생)) 7녀(베라, 나제즈다(1888년생), 류보프(1898년생), 소피아(1902년생), 올가(1905년생), 류드밀라(1910년생), 엘리자베타(1912년생))가 있었다. 가족들은 다른 한인들과 함께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해 뿔뿔이 흩어졌으며 그 중 최초의 한인 출신 러시아 해군 장교였던 둘째 아들 파벨(또다른 이름은 최성학), 딸 류보프는 1930년대의 스탈린의 대숙청에 휘말려 총살당하고 자식들 중 일부는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기도 한다. 사위들 중 4명(기록이나 증언에 따라 5명)도 총살당하는 등 크게 고생했다. 그의 자식 중 살아남은 건 발렌틴, 올가, 엘리자베타, 류드밀라, 소피아 뿐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