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데믹 역사 '아일랜드 대기근'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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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데믹 역사 '아일랜드 대기근' 사건

아일랜드의 기근은 1740 ~ 1741년, 1847 ~ 1852, 1879년으로 총 세 차례 있었다. 그 중 아일랜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던 두 번째 기근을 가리켜 '대기근'이라고 부른다. 영국 본토의 수탈로 인해 아일랜드에는 감자 이외에 먹을 것이 거의 없던 와중 감자가 병들어 버렸다. 말 그대로 먹을 것이 없어져 대규모 아사가 발생하였다.

아일랜드에는 청동기시대때부터 켈트족이 정착해 살고 있었다. 아일랜드는 잉글랜드가 노르만 왕조에 정복당한 후인 12세기 후반부터 헨리 2세의 주도 하에 잉글랜드의 침입이 계속되어 점차 예속화되어 갔다.

16세기 유럽을 강타한 종교개혁으로 잉글랜드의 국교가 성공회로 바뀌면서 잉글랜드는 아일랜드인에게 성공회를 믿을 것을 강요했다.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인들은 저항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1세부터 시작하여 올리버 크롬웰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 지배층은 아일랜드인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다음 아일랜드 자영농들의 토지를 몰수해 아일랜드로 건너온 잉글랜드인들에게 나눠주었다. 잉글랜드인이나 성공회로 개종한 일부 아일랜드인들은 대규모 토지를 소유한 지주층이 되었다. 나머지 아일랜드인은 소작농으로 전락해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소작농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상대적으로 값이 싼 감자를 대량으로 재배했다. 아일랜드인 소작농들이 먹는 감자는 주로 개인 텃밭에 심었다. 일년 내내 감자와 버터 밀크만으로 버티는 수준이었다. 대기근이 아일랜드를 덮치기 직전인 1846년에 조사된 결과에 따르면, 성인 남성이 단 하루에 최대 6.35kg(14 파운드)에 달하는 감자를 소비했다고 한다. 대식가로 명성이 자자한 조선인들조차 밥 한 공기에 약 690g 정도의 쌀을 먹었다고 하니, 아일랜드인들은 어마어마한 양의 감자를 먹었던 것이다. 결국 감자의 끝내주는 구황효과로 어찌어찌 가난을 견딜 수 있게 된 아일랜드 하층민들은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있게 되었고, 아일랜드의 인구는 눈에 띄게 증가했다. 당시 경제학자였던 맬서스는 아일랜드의 상황을 보고 '인구론'에서 '곡물 생산량은 산술 급수로 늘어나는데 이렇게 기하 급수적으로 애들을 낳기만 하면 분명 인류는 망한다'라고 적었다.

1801년, 아일랜드는 그레이트 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에 합병되었다. 대기근이 일어나기 직전인 1840년대 후반의 아일랜드 인구는 800만 명 정도였는데, 인구의 1/4이 무려 86%의 토지를 독점하고 있을 정도로 빈부 격차는 심각한 상태였고 그만큼 빈민의 수도 많았다. 아일랜드 농업은 기본적으로 영국이 필요로 하는 밀과 소, 돼지를 키우는 플랜테이션 체제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아일랜드가 대영제국이 이이제이 전략을 통해 현지 정치체제를 해체하고 플랜테이션을 강제한 제국주의의 첫 실험장이자 희생자였다는 데 주목하기도 한다.

'당시 아일랜드 감자의 종이 한 종류 뿐이라서 병이 돌자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아일랜드 대기근은 식물 병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진균류가 식물병을 일으킨다는 최초의 입증인 동시에, 한가지 품종만 심는 것이 어떤 재앙을 불러일으키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특히 감자는 유전적 문제로 인해 더 문제가 심각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아일랜드 대기근의 가장 큰 원인은 종 다양성의 문제가 아니다. 아일랜드 섬의 기후 자체가 극히 불안정하여 현대 기술 없이는 곡물 경작이 극히 어려웠기 때문에 인구가 불어난 아일랜드인들은 감자만 먹을 수 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역병으로 감자가 다 사라지고 구제마저 끊기면서 재앙이 일어난 것이다. 사실 아일랜드에서 밀과 호밀이 경작 가능한 곳은 더블린 주변의 영국인 거주지역뿐이었다. 이 지역은 기근을 피해갔다.

1842년 미국 동부의 감자 농장은 대규모의 감자 역병으로 인해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이 역병은 순식간에 북미 전역으로 확산된 뒤 다시 배를 통해 전 유럽으로 번졌다.

감자 역병균의 포자는 잎에서 증식하기 시작해 섭씨 10도 이상, 습도 75% 이상인 조건, 그러니까 여름만 되면 쉽게 조성되는 조건에서 이틀 정도만 있으면 작물 전체로 퍼진다. 만약 이 때 비가 내리면 포자가 빗물을 타고 땅에 스며들어 식용으로 쓰이는 덩이줄기 부분까지 퍼지게 되며, 병균 포자가 바람을 타고 다른 곳으로 날아가 작물을 전염시키기도 한다. 역병에 걸린 감자는 이파리 끝과 줄기에 짙은 반점이 생기기 시작하고, 감염된 덩이줄기는 갈색으로 변하면서 다른 세균이 침입하면서 2차 감염으로 썩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하필 이 시기, 그러니까 1845년 여름의 아일랜드는 유난히 비가 잦았던 탓에 밀과 같은 다른 작물의 작황도 엉망이었을 뿐만 아니라 감자 역병이 돌기에 최적인 환경을 제공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1845년 가을, 감자 수확이 시작되면서 대재앙이 막을 올렸다.

이 때, 영국 정부는 역병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적극적인 구제 활동을 펼쳤기 때문에 문제가 커질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 본토에서 정부가 직접 밀을 공급하여 1845년 겨울 동안 70만명을 구제했고, 1846년에는 곡물법을 폐기하여 밀의 수입을 자유화함으로서 식량의 유통량을 늘리는 한편 간접적으로 식량의 가격을 조정하려 했다.

그러나 1845년의 겨울을 넘긴 아일랜드 소작농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비록 곡물법의 폐기로 밀 관세가 철폐되었으나, 감자 역병으로 농사를 망친 지역은 아일랜드만이 아니었으므로 외국에서 많은 식량을 들여올 수 없었다. 그로 인해 폭등하는 식량 가격을 안정화시킬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식량이 아일랜드로 들어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아일랜드로 들어온 식량 대부분은 항구 도시와 그 인근 지역에만 유통되었다.

사실 아일랜드에서 밀을 비롯한 작물은 1845년의 흉작을 제외하면 계속해서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심지어 가축의 수출은 대기근 내내 증가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환금 작물을 재배하고 남은 자투리 땅에 감자를 심어 식량을 자급자족하던 아일랜드의 빈농들이 수입 식료품을 구입하기는 힘들었다. 그나마도 아일랜드뿐만 아니라 전 유럽을 휩쓸었던 대기근으로 인해 수입 가격이 폭등해 있었다. 아일랜드에는 제 돈 주고 밀을 사먹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밀과 가축 대부분이 계속 수출되고 있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1846년의 곡물 수출은 아일랜드 자체 소비를 위해서 1/3수준으로 폭락했다. 또한 정부는 공공 공사를 시행하고 공사비 전액을 현지에서 지출함으로써 아일랜드인 노동자를 먹여 살렸다.

그래도 기근 첫해에는 정부가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 개입했기 때문에 상황이 양호한 편이었다. 그런데 정권이 교체되고 자유당이 집권하자 자유방임주의적 원칙에 따라 직접적인 개입에 제동이 걸렸다. 쉽게 말해 물고기를 주는 것보다는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는 논지였다. 이런 주장에는 곡물 상인들이 자기네 이익이 저하된다며 반발을 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결국 업자들의 반발과 정부의 무관심으로 지원은 중단되었고 이제 공권력은 기근에도 불구하고 식량이 어디로 유통되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1845년에 5만 명이었던 아일랜드인 이민자 숫자는 1846년 10만 명으로 폭증했다.

그나마 1846년에 아일랜드를 탈출한 이들은 이후에 닥쳐올 최악의 사태를 보지 않고 떠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행운아였다. 자유당이 집권한 1846년 여름부터 정부는 식량 공급을 포기했으며 아일랜드는 계속 유럽에 식량을 수출했다. 더군다나 씨감자도, 씨감자를 묻을 땅도 잃어버린 빈민들을 1846년의 기록적인 폭설과 한파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기근 시대 사망자의 대부분이 1846 ~ 1847년의 겨울에 발생했다.

아일랜드인들은 입에 넣어 소화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먹어서 목숨을 부지해야 했는데, 유럽에서는 거의 식용으로 쓰지 않는 해조류까지 닥치는 대로 채취해 먹는 지경까지 갔다. 이때 많이 먹었다는 적갈색 해조류에는 '아이리시 모스(Irish Moss)'라는 별명까지 붙어있고, 지금도 저 해조류로 만드는 젤리나 음료수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846~1847년 겨울의 참사 이후, 아일랜드에서는 빈농이고 지주고 모두 몰락하기 시작했다. 1847년 2월 자유당 정권은 뒤늦게 구제소를 마련하고 무료 식량 공급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자유주의에 따르자면 정부가 그 책임을 도맡아서는 안되었다. 그러자 자유당 정권은 새로운 병크를 더 추가하는데, 6월에 해당 지역 납세자들이 모든 책임을 떠맡도록 법제화해버렸다. 토지 소유주들이, 구제소에 의존해 목숨을 잇고 있던 아일랜드인 300만 명의 구호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막대한 구제 비용을 감당해야 했던 아일랜드 지주들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자기 토지에서 굶어 죽어가는 소작농들을 쫓아내기 시작했지만, 이렇게 쫓겨난 소작농들을 대신해 농사를 지어 지주들에게 지대를 낼 사람은 이미 아일랜드에 존재하지 않았다. 주 소득원을 자기 손으로 내쫓아버린 지주들은 줄줄이 빚더미에 올라 서로 땅을 떠넘기며 무너졌다. 오히려 이들의 땅과 농장을 영국인들과 친영국파인 아일랜드 신교도들이 헐값에 대거 매입했다. 아일랜드의 구교도와 신교도간의 경제적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아일랜드인의 반영 감정은 증폭되었다.

빈민 구제를 위해 영국의 종교단체들이 아일랜드에 들어갔는데, 순수한 성격의 자선 및 구제 사업을 시행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빈민 구제를 핑계로 가톨릭 신앙을 버리고 성공회나 개신교로의 개종을 강요하는 작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는 아일랜드 영화 블랙 47에서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다.

빅토리아 여왕은 1849년 아일랜드를 방문했는데, 이때 여왕이 방문한 항구도시인 코브(Cobh)는 이를 기념해서 도시 이름을 '여왕의 도시'란 뜻의 퀸스타운(Queenstown)으로 바꾸었다. 당시만 해도 빅토리아 여왕에 대한 아일랜드인들의 감정은 나쁘지 않았고, 비교적 호의적으로 여왕을 환영했다. 여왕의 방문을 통해서 아일랜드의 참상이 더 잘 알려지고 영국 정부는 보다 효과적인 지원 정책을 추진했다...면 해피 엔딩이었겠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여왕은 퀸스타운과 그 근교만 방문했고, 당연히 이 곳들은 여왕의 방문을 앞두고 사전에 지원을 받았다. 여왕은 아일랜드인들이 윤택해 보이는 모습만 목격할 수 있었다. 따라서 빅토리아 여왕은 아일랜드의 현실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떠났고, 그러니 아일랜드에 대한 관심도 오래가지 않았다.

결국 아일랜드인들은 고향을 뒤로 한 채 머나먼 이민길에 올랐다. 2010년 통계에 의하면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수는 3,467만 명에 달해 독립국 아일랜드 인구의 7배를 넘기는 수준이다.

아일랜드는 대기근 이후 현재까지 기근 전의 인구 수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대기근 직전 800만이었던 아일랜드 인구는 대기근 쇼크 후, 이민으로 인한 인구 감소가 이어진 끝에 독립 당시 400만명으로 내려 앉았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아일랜드와 북아일랜드를 합쳐도 650만명정도인 수준이다.

아일랜드인들은 단위 면적당 뛰어난 생산력을 자랑하는 옥수수를 왜 키우지 않았냐는 의문이 생길 법 하다. 당시 아일랜드 소작농들은 옥수수 종자를 살 자본이 없었을 뿐더러, 아일랜드에서의 생산 효율은 옥수수보다 감자가 높았다. 당시 유행했던 부업 중 하나였던 돼지 사육에 필요한 부수물[24]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근 중에 영국이 옥수수 가루를 배급했고 아일랜드인들이 이걸 유황 가루로 착각해서 폭동을 일으켰다는 잘못된 소문이 있다. 당시 아일랜드는 이스터 섬 마냥 고립된 섬이 아니었고 외부에서 여러 수단을 통해 식량이 유입되었다. 이미 많은 아일랜드 사람들은 미국에 진출해 있었고, 그들 덕에 상당한 식량이 아일랜드로 유입되었다. 다만 낙후된 수송능력 때문에 식량이 제때 도착하기 어려웠고 아일랜드 항구에 도착해도 그 구역에서 다 소모되었다. 드넓은 아일랜드 전역을 담당하기는 불가능했다. 알려진 것처럼 옥수수를 유황 가루로 인식해서 사람들이 감자를 찾으며 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은 루머에 불과하다. 옥수수 가루라도 제대로 공급됐으면 대기근이라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량조차 채우지 못한 배급량 덕에 사람들은 옥수수를 아주 멀겋게 끓인 죽조차 먹기 힘들었다. 게다가 설령 죽을 받더라도 위에서 말한 이유로 그냥 물에 가까운 무언가. 받기도 힘든데 겨우 받은 것도 엉망, 사람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이 혼란 와중에 잉글랜드 놈들이 우리에게 유황을 먹이려 든다!라는 소문이 돈 것이다.

또한 당시 대부분의 아일랜드인은 맷돌이 없었다. 한국에서 흔히 먹는 옥수수는 sweet corn으로 그냥 삶아먹으면 되지만 당시 주식으로 먹던 옥수수는 아주 단단해 맷돌로 갈아 옥수수 가루로 만들어 먹어야 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밀가루도 먹어야 하므로 맷돌이 동네마다 있었는데 아일랜드는 감자밖에 먹을 게 없으니 맷돌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영국 정부가 급히 미국 옥수수 화물선을 아일랜드로 보냈지만 단단한 옥수수를 먹을 수가 없었다. 영국에서 맷돌까지 급히 보내주고 나서야 옥수수 가루를 내 죽을 먹을 수 있었고, 아일랜드인은 난생 처음 맷돌로 옥수수 가루를 내며 '영국 총리의 유황 가루'라 투덜거렸다. "아일랜드인들은 감자 외에는 요리할 줄 모른다"는 말이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던 셈이다 

아일랜드에서의 생산 효율이 옥수수보다 감자가 더 높았던 또 다른 이유는 옥수수가 C4식물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강한 빛에서 광합성 효율이 높은 작물이라는 점인데, 아일랜드의 날씨는 영국보다 덜하지만 맑은 날이 적은 편이다. 따라서 아일랜드의 기후에서는 옥수수가 감자에 비해서 효율이 크게 높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오해 내지는 착각을 하는 경향이 있는 데 영국의 위도는 모스크바보다 비슷하거나 더 높다. 기후가 온후한 건 편서풍과 멕시코 난류 덕분이기 때문에 연평균 기온 대비 일사량 자체가 적다.

여기에 옥수수는 지력을 소모시키는 경향이 강해 비료의 존재가 없다면 계속해서 농사를 짓는 게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 시기 유럽에서 옥수수를 주식으로 먹은 이들 사이에서는 펠라그라 병마저 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비싼 돈 들여가면서 옥수수를 심을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