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만행 '치치지마 식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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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사회.정치.역사.인물

일본군의 만행 '치치지마 식인 사건'

 

1945년 2월경 오가사와라 제도의 치치지마에서 벌어진 사건. 오가사와라 사건, 치치지마 사건이라고도 부른다.

산 사람을 일부러 살해하고 그 시신을 먹은 식인 사건이었으며 이 사건을 저지른 다치바나 요시오의 휘하 부대는 식량 부족으로 고생하던 형편도 아니었다. 오히려 임팔 전투 때 무타구치 렌야 중장 휘하의 일본군 식량 사정이 훨씬 더 열악했다. 저때 임팔에서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당시 31사단장의 독단적 전선이탈과 그 전에 일본 군인들이 부른 노랫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전쟁 중 식인을 했던 부대는 이들 말고도 더 있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극도로 처참한 전황에 굶어죽기 직전까지 몰린 자들의 최후의 선택이었다. 독소전쟁 당시의 소련군 역시 보급, 특히 식량이 너무나도 부족한 나머지 얼어죽은 전우의 시신을 녹여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적어도 이들은 이미 죽은 시체들을 먹었지, 생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



섬의 수비를 맡은 일본 육군 중장 다치바나 요시오와 함께 있던 일본 해군 중장 모리 쿠니조, 그 부하들이 미군 포로를 살해해 인육을 먹고, 대대원들에게도 인육을 강제로 먹인 사건. 실제로 하급 장교들은 인육을 먹지 않았다고 상관들에게 얻어터졌던 일도 있다고 한다.



사실 전쟁 중에 고립된 부대가 식량이 부족해서 식인을 하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다. 소련군도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는 식량이 심각하게 부족해서 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는 일이 너무 빈번하게 일어나서 따로 식인을 막기 위한 임시 자경대를 만들어야 했고, 독일군 6군도 스탈린그라드에 갇혀서 보급이 안 되자 시신을 먹는 일이 종종 있었다. 문제는 소련군이나 독일군 같은 경우는 이미 죽은 사람의 시체였고 식량 부족이란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거지만, 일본군은 치치지마에 있을 당시 식량이 심각하게 부족한 상태도 아니었던 데다가 살아있는 사람도 죽여서 먹었다는 점이다.

특히 일본군은 열대 섬이라는 특수 환경과 연합군이 보급선을 열심히 박살내버리는 작전의 이중 크리가 터지면서 결국 기아에 허덕이다 인육을 먹는 사례가 자주 있었다. 실제 뉴기니 전선에서 육군 제18군사령부는 1944년 12월에 "연합군의 인육을 먹는 것은 허락하지만 아군의 인육을 먹으면 엄중하게 처벌한다"는 지침을 내렸으며, 실제로 명령을 위반한 병사 4명을 처벌했던 것이 전후 도쿄전범재판 때 밝혀졌다.

미군도 처음에는 식량 부족으로 이런 짓을 저질렀나보다 생각했지만, 상술했듯 치치지마는 결코 식량 부족 때문에 식인을 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치치지마의 식량 상황은 쌀 배급량이 5홉에서 3홉으로 줄었지만 본토보다는 훨씬 사정이 나았다. 추가 조사 결과 식인의 동기는 어처구니 없게도 식인을 통해 수비대 장병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처벌이 엄청나게 강했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사기 진작을 한답시고 한 행동이 고위 장교 몇명이 인육에 술파티를 벌인 것이 고작(?)이다.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서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결국 식인 사건의 동기는 사기 진작을 위한 소(小)영웅주의나 엽기적인 호기심, 그리고 포로를 학대하는 일본의 군사문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데에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식인종들을 재판한 괌에서의 재판 경과와 증언들을 보면 특별한 술안주가 먹고 싶어서라는 이유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패전 후 1945년 9월 2일 치치지마에 미군이 상륙해서, 9월 3일 다치바나 장군과 모리 제독이 대표로 미 해군 전함에서 정식으로 항복했다. 항복 교섭에서 미군은 낙하산으로 탈출한 미 해군 조종사가 몇 명 있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다고 했는데, 교섭에 나섰던 호리에 요시타카 참모는 방공호에서 포로 전원이 폭사했다고 둘러댔다. 이미 일본군은 전범으로 처벌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 면밀하게 입을 맞추어 두었고, 포로들의 가짜 묘도 만들고 전 부대원에게 함구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치치지마의 일본군의 본토 귀환도 순조롭게 이뤄져 다치바나 등은 안도했지만, 그동안 미군은 일본 본토로 조사관을 파견하여 귀환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진상을 파악하고 있었으며, 1946년 2월 들어 본격적으로 이 식인종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재판에서는 식인이 아닌 시체 훼손과 포로 살해 등의 혐의로 재판을 진행했으며, 검사 아서 로빈슨 미 해군소장의 지휘에서 열린 재판의 결과 다치바나 요시오 장군 외 4명에게 포로 살해 및 시체 훼손 혐의가 적용되어 사형에 처해졌으며, 치치지마 섬에 주둔한 해군 최선임 자였던 모리 쿠니조 제독을 포함한 다수가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리고 이들은 사형이 집행당하는 그날까지 심한 학대를 당했다고 한다. 2명은 맞아죽었고, 나카지마 노보루는 사형 당일 '국가를 증오하면서 죽어간다'고 유일하게 유언을 남겼다.

모리 쿠니조 제독의 경우에는 종신형을 받았지만,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남방 전선 당시 포로 학살 사건 문제로 네덜란드 측에 의해 다시 기소되었고, 결국 사형을 선고받고 술라웨시 섬 마카사르에서 총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