틱광둑 스님은 베트남의 고승으로 베트남 불교단체에 의하면 7살때 출가했고 이후로 1932년까지 수행을 거듭하다가 1932년에 안남불교회가 성립되면서 베트남 중부와 남부 일대를 돌아다니며 포교와 사찰재건에 힘을 썼다. 이후로 캄보디아로 유학가면서 남방불교에 대해서도 공부했고 베트남이 프랑스 지배체제에서 벗어난 후로는 남베트남에 머물며 사찰 재건 및 포교, 신도 교화에 힘을 쓰면서 남베트남 불교계의 거목이 되었다.
그러나 바오다이를 내쫓고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Ngô Ðình Diệm)이 불교 탄압정책과 독재정치를 펴기 시작했고, 거기에다가 친인척들이 대규모로 비리를 저지르면서 남베트남의 형세가 다시 막장이 되어가기 시작했고, 거기에다가 불교탄압 정책에 맞서 시위하던 스님들을 무차별 진압하는 일까지 벌어지다. 탁꽝득은 이에 맞서서 소신공양을 하기로 결심했고 1963년 6월 11일 불교 승려들의 침묵 가두시위가 있을 당시 틱광둑 스님이 주변 승려들의 도움을 받아 사이공에서 가부좌를 틀고 소신공양을 감행하였다. 그리고 이 사진과 영상이 특보에 호외, 속보를 타고 전 베트남은 물론 전 세계로 일파만파 전파되었다. 소신공양 당시 세수 67세(세는 나이), 법랍 47년이었다.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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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행위는 정권에 저항한 분신자살의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영상에서 볼 수 있듯이 끝까지 가부좌를 풀지 않고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틱광둑의 행동은 종교적인 열망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 중 최고순위가 작열통(몸이 불에 탈 때 느끼는 고통)인데, 죽음에 이를 때까지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태연하게 견딘다는 사실은 초인적인 인내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행위이다.
소신공양을 감행하기 이전에 제자들에게 "앞으로 넘어지면 흉한 것이니 해외로 피신해야 하며, 뒤로 쓰러지면 투쟁이 승리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동영상을 보면 소신공양 중에 불길이 거세지자 쓰러질 듯 앞으로 기울어졌으나, 마지막 혼신의 힘을 쏟아 다시 가부좌 자세로 정좌하며, 결국은 뒤로 쓰러진다. 이건 정말 자유에 대한 갈망이 낳은 기적적인 일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인간의 근육은 구부리는 근육이 펴는 근육보다 많기 때문에, 소사체는 근육들이 수축해 자연스레 안으로 오그라들기 때문. 정말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고통 속에서 최후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서 몸을 펴고 열반했다. 이 엄청난 장면에 경찰들까지도 넋을 잃고 멍하게 서서 스님을 바라 보았고 주위의 승려들은 틱광둑에게 일제히 절을 올렸다.
소신공양이 끝난 후 그의 법체는 다시 한번 소각로에 넣어져 8시간 동안 화장(火葬) 되나, 그의 심장은 전혀 타지 않았다고 하며, 이후 남베트남 정부에서 파견된 비밀경찰이 황산을 뿌려 훼손을 시도했으나 이마저도 실패하며, 금속 용기에 구리줄로 봉인하여 스웨덴 은행에 맡겨졌다가 이후 하노이 국립은행에서 소장 중이라고 한다.
이 사진이 미국 언론에 보도된 덕분에 원래도 이미지가 안 좋아지고 있던 응오딘지엠 정권의 이미지는 바닥을 치게 되었고 응오딘지엠을 그때까지 지원하고 있던 미국은 부패 정권을 돕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됨으로 베트남 개입의 명분이 약해졌다. 그리고 인구의 90%에 달하는 불교를 탄압하며 어그로를 끌던 응오딘지엠 정권에 민심은 더욱 분노하게 되어 사회 혼란은 가중되었다. 게다가 응오딘지엠의 동생인 응오딘누의 마누라 "마담 누" 쩐레수언의 '바베큐'로 요약할 수 있는 정신 나간 발언은 베트남 사람들의 깊은 빡침을 불렀고, 남베트남을 지원하던 미국 정부까지 어이퇴갤하여 응오딘지엠 정권을 완전히 포기한다. 불과 몇 달 후 응오딘지엠 정권은 미국이 지엠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다는 것을 확신한 군부의 쿠데타로 붕괴했다.
베트남전의 시작과 끝을 각각 한 장의 사진으로 표현한다면 틱광둑의 소신공양 사진으로 시작하여 소녀의 절규로 끝나지 않을까. 왓치맨(영화)에서도 오프닝에서 베트남전을 상징하는 TV 영상으로 위 장면이 나왔다.
또한 이 사진은 서양의 발달된 물질문명으로 동양을 농락할 수 있다고 여겼던 서양 세계를 전율케 만들었다. 베트남 전쟁의 미국 패배는 이미 이 순간 결정되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정도. 이러한 의미에서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의 앨범 자켓으로 쓰이기도 했다. 틱광둑의 소신공양 이전까지 동양의 이미지는 단순히 미개하고 개화되지 않았으며 전근대적인 동네라는 인식 정도였지만, 이 일 이후 서구 지식인들은 과연 서구의 물질문명이 동양의 정신적 문화의 가치를 압도할 수 있는지에 대해 본질적으로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 일이 있은 후 1970년대부터 서구에는 도리어 뉴에이지와 같은 반동적 흐름이 나타났는데 이것도 아주 무관하다고 보기는 힘들 것이다.
세간에 떠도는 유명 어록 중에는 마틴 루터 킹이 이 사건을 거론하면서 남긴 말도 전해지고 있다.
…1963년 베트남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기독교의 도덕관념이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래도 좀 다릅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 본질을 살펴보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항 행위도 아닙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이지만, 어째 한국에서는 그리 기억되는 사건이 아니었다. 반공주의의 영향과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한국의 상황상 베트남 전쟁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허용하지 않았던 분위기 때문. 심지어 과거에는 교과서에서 틱광둑의 소신공양 사건을 베트남의 혼란상으로 서술하기까지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