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미
배우들 사이에서도 눈에 확 띄는 미모, 파란만장한 남성편력 덕분에 한국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별명이 붙었다. 정작 본인은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엘리자베스 테일러고, 나는 나다"라며 별로 내켜하지 않는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연예계에서 자타공인 당대의 미모 원탑 소리를 듣는 두 사람 중에 한 명이다. 참고로 다른 한 명은 정윤희. 그 이후에도 미인 여배우는 많았고 다른 여배우를 압도한다는 얘기를 듣는 여배우도 많지만 당대의 원탑 미모라고 했을 때 거의 반론이 나오지 않는 여배우는 김지미와 정윤희 두 명 뿐이다.
1940년 대전에서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큰 사업체를 운영하여 초등학교 때 뷰익이라는 자가용을 타고 등교할만큼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다. 큰오빠와 큰언니는 각각 서울대 문리대와 음대 출신의 엘리트였다고. 당시 배우들은 대개 어려운 집안을 일으키고자 연예계에 입문한 경우가 많았으나 그녀는 예외였다.
덕성여고 재학 시절 친척언니가 운영하는 명동 백조다방이란 곳에 놀러갔다가, 김기영 감독의 눈에 들게된다. 원래 김지미는 미국 유학을 가는 큰오빠를 따라갈 예정이어서 제의를 거절했으나, 감독의 끈질긴 제안으로 영화계에 데뷔하게 되었다. 당시 캐스팅했던 김기영 감독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예쁠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만큼이었다. 간혹 젊은 세대가 왕년의 미인 여배우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경우가 있는데 반면 김지미는 요즘의 기준으로도 상당한 미인이다.
1957년 김기영 감독에게 픽업되어 <황혼열차>로 데뷔한 김지미는 1990년대까지 활동하면서 450편의 작품을 남겼다. 데뷔 초기였던 1960년대에는 선배 최은희와 경쟁했는데, 흥미롭게도 '춘향전'을 비슷한 시기에 김지미(홍성기 감독)와 최은희(신상옥 감독)가 각자 버전으로 찍고 동시 개봉하면서 라이벌전을 벌이기도 했다. (결과는 신상옥 최은희 페어의 승리로 끝났다.) 1960년대 후반 부터는 후배 윤정희와 치열하게 경쟁했다. 1960년대 후반 최은희, 엄앵란, 문정숙, 최지희, 김혜정 등 기존에 활동했던 여배우들이 모두가 2진으로 물러났지만 유일하게 살아남아 그 후에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1980년대에는 자신의 영화사 지미필름을 설립하고 임권택 감독과 콤비를 이루면서 <길소뜸>과 <티켓>이라는 일생일대의 역작들을 제작하였다. 그러나, 임권택 감독과 함께한 작품 외의 영화들은 수준 이하의 범작들이었고 이후 영화인협회 회장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나 영화인들의 신구세대 다툼 속에 욕만 먹고 물러났다. 영화 수입도 했는데 마지막 황제가 바로 지미필름에서 수입해와 1988년 흥행 1위를 차지한 경우다. 로보캅 1편 역시 지미필름에서 수입해와서 대박을 친 케이스.
홍콩의 액션 스타 왕우가 김지미에게 반해서 자신의 영어 이름을 지미(Jimmy)로 지었다는 설이 있다.
소설가 황석영이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밝힌 바에 의하면, 황석영이 중학생 수영 선수 시절 안양 유원지 수영장에 놀러 갔을 때, 마침 영화 촬영차 거기 와있던 김지미가 수영장 물에 빠뜨렸던 선글라스를 찾아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본 김지미의 미모를 생각하면 아직도 떨린다고 밝혔다. 선글라스 찾아줘서 고맙다면서 그 예쁜 누나가 촬영장으로 데려가서 참외도 깎아주더라는 이야기도 덤.
한 때 신내림을 받았다는 소문이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역시나 사실무근이었다.
마지막 영화는 이장호 감독 영화 <명자 아끼꼬 쏘냐>인데 당시 거액을 들겨 일본-러시아를 오고가며 촬영했지만 흥행이나 평은 대실패였다. 이 영화가 워낙 망해서 제작과 배급까지 하던 김지미는 큰 손해를 보았고 결국 지미필름도 이로부터 1년도 안가 문닫아야 했다. 가장 큰 논란은 이미 50대이던 김지미가 20대 여주까지 연기해서 도저히 아무리 분장해도 웃음이 나올 터였기에 당시 극장에서 보고 어이없게 했다.
논란
90년대 후반에 정권이 바뀌자, 당시 젊은 세대의 영화인들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인터뷰를 하며 초광역 어그로를 끌었다. 이 후 2011년 9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명계남·문성근을 직접 언급하며 "(당시 영화계 현안을) 영화인협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면 될 것을 다른 단체를 만들어 데모만 해 영화계 물을 흐렸고, 구세대들을 다 물러가라고 했다"면서 "이런 식이면 공산당과 뭐가 다른가"라고 발언하기도 하고 문화일보에서 인터뷰로 문성근, 명계남을 지칭하며 "배우가 정치색을 띠면 안 된다. 오로지 좋은 연기자가 되는 데 전력을 다해야 한다. 나는 50여년 배우 생활을 하며 이렇게 박수를 받지만, 그때 설쳤던 '아이'들은 생명이 끝났지 않았느냐면서 "걔네들이 아직 활동하는가"라고 발언했다.
그리고, 201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인의 회고전을 하자 영화제 측에 도를 넘은 지나친 의전 요구를 하여 구설수에 올랐다. 자신의 의전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시 회고전을 보이콧하겠다고 공갈협박을 했는데, 당시 김지미가 요구한 조건은 자신의 친인척, 지인들을 위한 특급호텔 객실 30개와 함께 자신의 지인들이 이동할 수 있는 대형버스를 요구했다고 한다. 주최 측은 객실 15개와 전용버스를 대절해주는 선으로 마무리했지만 이 협상 와중에 피를 말리면서 고생했다고 한다.
영화제 주최측에서는 그간 쌓여왔던 신구세대 영화인들간에 갈등과 분열을 봉합하고 서로 화합하자는 좋은 취지로 김지미의 회고전을 주최하고, 김지미를 초청했지만, 영화제 측의 이러한 좋은 취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김지미는 귀국하자마자 후배 영화인들을에 대한 근거 없는 일방적인 비방과 인신공격을 하여 좋은 취지를 가지고 자신을 초청해준 영화제 주최측을 당혹시켰고, 결국 김지미의 회고전에는 강수연 등 친분이 있던 일부 후배 여배우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젊은 영화인들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는 그녀만의 축제로 끝나며 젊은 세대의 영화인들, 평론가들로 부터 냉소와 비웃음만 받았다.
이후 2017년 한국영상자료원의 시네마테크 KOFA 에서는 김지미의 데뷔 60주년을 기념하여 김지미의 회고전을 또 다시 주최 했다. 대중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접을 받는 이유는 김지미가 영화에서 누린 인기는 상상이 안 갈 정도로 엄청나기 때문이다. 이미 데뷔 때부터 최고의 미녀로 유명했으며, 60년대에 1세대 여배우 트로이카가 활개를 치던 시기에 파란만장한 가정사를 안고도 꾸준히 인기를 유지해 나갔으며, 이미 여배우로서 생명이 다한 80년대에도 길소뜸, 티켓 등의 흥행작을 낸 배우이다. 대한민국 연예계 여배우 중에서 이정도로 오래 최정상급으로 인기를 유지한 여배우는 최은희, 윤정희, 장미희 정도 뿐이다. 사실 김지미가 위에서 보여준 후배 영화인들에 대한 태도도 이런 화려한 본인의 영화계 인생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네번의 결혼
정확히 말하면, 나훈아와는 사실혼 관계였으므로 법적 결혼은 총 3번이었다. 이혼 역시 3번 했다.
홍성기 감독
1957년 황혼열차로 영화계에 데뷔한 김지미는 1958년 18살의 어린 나이에 12살 연상의 노총각인 영화감독 홍성기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홍성기 감독은 계속되는 영화 제작의 실패와 홍성기 감독의 외도로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최무룡 배우
홍성기와 결혼한 김지미는 홍콩에 합작 영화를 촬영하러 갔다가 최무룡과의 만남이 시작되었는데...
1962년 당시 한국 최고의 톱스타 최무룡과 간통 혐의로 함께 구속되었다. 수갑을 찬 두 사람의 행복해 하는 모습에 당시의 언론은 연일 화제가 되었다. 지금 관점으로도 충분히 파격적이지만 당시 시각으로는 그야말로 초대형 스캔들이었다. 결국 1963년 최무룡은 아내인 배우 강효실과 이혼하는데, 이 때 이혼 위자료를 김지미가 지불했다. 그 당시 대한민국 최고의 위자료인 400만원(위자료 330만원+채무 70만원)을 지급하면서 또 다시 화제가 되었다. 당시 400만원은 이루 헤아리지도 못하는 거액이었다. 심지어 6년 뒤 최무룡과 이혼할때도 김지미가 이혼 위자료를 전부 부담했다고 한다. 당시 여성 혼자 그정도의 재력을 갖고 있기가 힘든 시대였고 통상적으로 이혼 위자료를 남성이 다 책임지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김지미의 위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참고로 간통 당시 최무룡은 세 딸과 백일무렵의 아들 최민수를 둔 상태였고, 김지미는 딸 하나를 두었었다. 잠시 최민수를 맡아 기른적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최민수는 성장한 후에도 어머니처럼 모셨다고 한다. 사실 최민수가 굉장한 대인인 셈이다. 아버지와 김지미의 관계로 인해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혼했고 이후 대부분을 친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는데도 대외적으로 김지미에 대해 험담을 하거나 원망을 보인적이 없다. 최민수 본인이 말하기를, 정말 이상하게도 그런 원망이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최무룡의 계속되는 영화 흥행 실패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1969년 두 사람은 결국 이혼한다. (이혼한 후에도 영화에서 부부로 출연하는등 배우로서의 관계는 유지했다.) 두 사람 사이의 혈육으로 딸 "밍크"가 있다. 딸 "밍크"(최영숙)는 훗날 단국대학교를 졸업한 손정호씨와 결혼했다. 최무룡은 후일 88년 13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했지만 크게 활약을 하지는 못했다.
2003년 신동아 인터뷰에서 4번의 결혼과 이혼을 회고하며 "나이 많은 남자, 어린 남자, 능력 있는 남자, 다 살아봤는데 남자는 별거 아니더라. 남자는 다 어린애고, 부족하고, 불안한 존재다. 그렇지만 함께 자녀를 낳아 길렀던 최무룡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밝혔다.
가수 나훈아
1976년 36살의 김지미는 7살 연하의 가수 나훈아를 만나 다시 한 번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 연예계에선 두번째로 연상연하 커플의 결혼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두 사람은 혼인 신고는 한 적이 없고 1976~82년까지 동거를 한 것으로, 사실혼 관계였다. 두 사람의 교제 기간은 6년이다.
원래는 사귀는 사이가 아니었고 같이 다니는 사이일 뿐이었으나 언론의 오해로 교제 중이라고 보도가 나고, 이에 김지미는 오기가 생겨 정말로 교제하게 되었다고 한다.
2013년, MBN 예능 프로그램 "아궁이"에 출연한 연예기자 1호 정홍택 교수에 의하면 김지미는 "내가 나훈아를 만난 것은 잘못인 것 같다"는 후회를 했었다고 전한다.
김지미는 훗날 "내가 한 결혼은 3번 뿐이다"라며 나훈아와의 동거를 후회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시하게 되는데... 원인은 자신의 딸로 인한 말 못할 아픔이라 카더라.
나훈아 팬들은 김지미에 대한 악감정이 큰 편이다. 두 사람은 부부였던 시절 함께 공중파에 등장한 적도 있는데, 이 영상이 업로드 된 유튜브 댓글을 보면 김지미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다.
이종구 박사
1991년 심장 질환의 전문의 이종구 박사와 4번째 결혼, 나훈아와의 만남에 힘들어 했던 그녀는 이종구 박사와의 만남에서는 가정적인 여성으로서의 변화를 원했지만, "나는 마누라가 필요한 사람이지 남편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을 훗날 한다. 보스기질 있는 자신의 성격에는 주부가 맞지 않았다는 말이다. 결국 결혼 11년 뒤에 이혼한다.
신성일의 회고에 의하면 신성일은 김지미와도 친했고, 이종구와도 친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종구가 김지미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신성일은 "형님, 네 번째 남편이 자랑스러운 건 아니지 않습니까?"라는 말을 하며 만류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종구는 신성일의 말을 듣지 않고 김지미와 결혼을 하였고, 이로 인해 신성일과 김지미의 사이도 멀어지고 말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