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문도 점령 사건은 1885년, 영국이 러시아 제국의 남하정책을 막기 위해 조선의 거문도를 점령한 사건이다.
프랑스 제2제국과 미국이 각각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로 조선의 문을 두드렸던 것과 달리, 인도 제국 경영과 청나라에서의 상업적 이익에 더 관심이 많았던 영국은 조선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만 1876년 조선이 개항하고 1882년 미국과 조선이 수교하자 뒤를 이어 서양열강 중 두 번째인 영국이 1883년에 수교하여 어느 정도 관심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거문도 점령은 영국이 느닷없이 조선을 침탈하려는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19세기의 강대국 러시아 제국과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면서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목적에서 일어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영국이 보기에 거문도 점령은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나 크림 전쟁, 영일동맹과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르지 않은 일이었다. 물론 거문도의 점령에는 조선의 의중은 반영되지는 않았다.
1853년 이래 1907년까지 무려 50년 동안 영국은 러시아 제국의 남하에 맞서 냉전에 버금가는, 전 지구적 규모의 대치 상태를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발칸 반도로의 남하가 좌절된 러시아 제국(1878)은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의 남하에 관심을 가졌고, 이는 영국으로서는 묵과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2차례의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러시아 제국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한 방파제를 확보하려는 영국의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1884년 7월 7일, 러시아 제국과 조선이 직접 수교를 하고(조러 수호 조약), 동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청군이 진압하였다. 이에 청의 내정 간섭이 증가하자 조선 조정이 러시아와 힘을 합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의 진상은 알 수 없으나 어느 정도의 근거는 있었다. 당시 고종은 인아거청, 즉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의 영향력을 줄이려 하였다.
고종은 김용원·권동수 등을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해 러시아 관리와 약정을 맺었다. 그 내용은 김옥균이 러시아 영토에 가면 압송해줄 것, 일본의 보상금 요구를 파기시켜줄 것, 조속히 조약을 비준하고 육로 통상을 체결할 것, 러시아 군함이 한국 연해를 보호해줄 것 등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러시아 정부는 보호 약속보다는 통상 조약 추인과 육로 통상, 안전에 관한 토론 용의 등에 대해서만 회답했다.
한편 해가 바뀌어 1885년, 갑신정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서상우·묄렌도르프는 비밀리에 주일 러시아 공사 다비도프와 만나 러시아 훈련 교관의 초빙과 영흥만 조차에 관해 협의했다. 묄렌도르프는 귀국하여 비밀 교섭의 경위를 고종에게 보고하여 윤허받았고 이에 정부간 정식 협약을 체결하기 위해 주일 러시아 공사관의 스페이에르가 입국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외아문독판 김윤식은 청의 총판상무 진수당과 일본 대리 공사 곤도 신스케에게 밀약 사실을 알리는 한편, 스페이에르에게 현재 미국 교관의 초빙 교섭을 진행하고 있기에 러시아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통고했다. 1885년 7월 묄렌도르프는 이런 행보가 들통나자 청의 압력에 의해 물러나게 되었다.
이렇게 조선과 러시아의 연대 가능성이 높아지자, 이를 확인한 영국은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러시아의 행보는 영국에게 조선을 통해 극동 - 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행보로 여겨졌다.[2] 깜짝 놀란 영국이 러시아 해군의 동태를 감시하고 유사시 러시아 함대의 남하를 막기 위한 일종의 중간 보급 기지 및 해안포 진지로서, 자기들이 명명하기로는 포트 해밀턴(Port Hamilton, 해밀턴 항), 바로 거문도를 골라 점령했다. 이 때가 1885년 음력 3월, 양력으로는 4월 27일, 조러 수호 조약 체결로부터 1년이 안 되는 시점이었다.
조선은 관련 당사국 -러시아, 청, 일본, 조선- 중에서 가장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다. 이는 전신선이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청에서 정보가 건너오느라 직통으로도 6일 차이가 있었다. 양력 4월 28일 조선으로 전문이 갔지만, 조선이 전문을 받아본 때는 주 조선 영국 대사관의 직원 스콧이 전달한 양력 5월 16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기준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참고로 파쇼다 사건 당시 프랑스군은 직접 본국의 의사를 물어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무려 그들과 대치 중인 영국군에게 부탁해서 개전 여부를 영국이 이집트에 가설한 해저 전신망으로 런던에 연락한 뒤 런던에서 파리에 해당 메시지를 전달하고 회신을 받아서 다시 프랑스군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본국의 명령을 받았다. 물론 프랑스 본국으로서는 횡단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은 뒤늦게 항의를 했지만 영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실 '거문도'라는 엄연한 명칭을 두고(혹은 의식조차 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가 붙인 해밀턴(Hamilton), 즉 합미돈이라는 명칭을 들이밀었으니 조선으로서는 상황 판단이 더 늦어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제일 먼저 소식을 접한 것은 청나라였다. 영국은 청나라의 도움을 받으려고 청의 조선 종주권을 지지한다는 유화적 제스쳐에 나섰으나, 청의 이홍장 역시 조선에게 '한번 조차시켜 주면 끝이 없다.'며 영국의 조차를 막으려 나섰다.
5월 조선의 사신이 거문도에 도착했을 때, 영국 해군은 외교 교섭과는 별도로 거문도 기항(임차) 대가 연간 5천 파운드를 지급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조선 측으로부터 명분 상 조선의 영유권을 인정하면서 거문도 기항을 정식으로 인정받으려는 것이었지만, 조선은 일단 영토 점령(임차)자체가 부당한 일이므로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했다.
일본은 이에 대해 조선의 항의에 동의하였으며, 독일은 영국의 자유당 정부와의 관계가 안 좋았지만 당시 영사였던 젬브쉬는 본국 훈령과 함께 개인적인 동정시선을 보냈다. 미국은 조선을 이해하는 동시에 러시아와의 예방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였다.
극동에서 영 - 러의 긴장이 고조되자 부담을 느낀 것은 청이었다. 청의 북양 대신 이홍장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는 영국을 내심 지지했지만, 청의 영향력이 약화될 수 있는 상황에서 노골적으로 영국의 편을 드는 것도 무리한 일이었다. 그래서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서서, 러시아의 남하는 없을 것이며 러시아와 조선의 밀약도 헛소문이라고 확인시켜줘서 영국을 안심시키려 했다. 영국은 조선 측이 보낸 속국 인정 전문을 받아들여, 청을 통해 러시아에게 조선을 점령하지 않을 것과 조선의 현상 유지를 요구했다.
한편 청은 러시아에게 영국의 지지를 받는 것처럼 위장하며 두만강 하류, 즉 연해주 끄트머리의 영유권을 회복하려고 들었고, 그 덤으로 자그만치 청한 종속 관계를 러시아에게 인정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이렇게 청이 두 열강 사이에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간을 끄는 사이 거문도 점령은 1886년 가을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은 그해 7월에 러시아에게 다시 보호를 요청했으며, 위안스카이는 고종을 폐위하려는 건의까지 올린 상황이었다. 청은 국제 외교 무대에서 조선이 속국이므로 외교권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였고, 이에 회답하는 나라는 없었지만 거꾸로 이를 반대하는 나라도 없었다
영국이 조선을 식민지화하여 동북아의 균형이 깨질 것을 우려한 서구 열강들은 앞을 다투어 거문도로 군함을 파견했는데 이 때문에 거문도는 흡사 세계 각국의 군함 전시장처럼 변했다고 한다.
결국 1886년 12월에야 협상이 이루어졌다. 러시아는 조선을 보호국화 하지 않는데 동의했으나, 청과 영국 역시 조선에 간섭하지 않기로 확인했다.
2년의 점령 끝에, 영국은 러시아가 남하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어느 정도 얻고, 동시에 거문도가 생각보다 요새화하기 어려워서 이를 시행하려면 꽤나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랬기에 청의 중재를 담보로 합의 3개월, 점령 22개월만인 1887년 2월 5일 거문도를 말그대로 도로 뱉어내고 철수했다. 또한 점령 시작 때처럼, 조선 정부는 영국 해군의 철수 소식을 가장 늦게 접했다.
이 사건으로 조선이 세계 열강의 분쟁에 편입되었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이에 조선에서는 열강의 대립으로 인한 불똥을 피하기 위해 영세 중립국론이 1885년 조선 주재 독일부 영사 부들러(H. Budler)에 의한 것과 개화파 계열의 소장 관료인 유길준에 의한 것의 두 가지가 서로 관계없이 구상되었으나 주변 열강들의 이해 관계 때문에 호응은 받지 못했다. 또한 이 사건으로 러시아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반발하여 제주도를 점령하려고 하였으며, 이 때문에 제주성 위협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일련의 사건으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점차 일본을 압도해갔으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진다.
한편 영국은 거문도가 별로 쓸모없다고 판단해 물러나기는 했지만 러시아의 남하에 대해 여전히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한 행동으로 보여주었으며, 이는 러시아에 부담이 되었다. 한편 러시아는 거문도 점령으로 말미암아 태평양 함대가 대양으로 나아가기 위한 길목이 차단되어 극동에서 러시아 해군의 움직임이 제한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육군을 극동에 보내 세력을 확장하기로 마음 먹었고,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완공을 위해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확보한 랴오둥 반도를 토해내도록 한 뒤, 1896년 만주에서 동청 철도 부설권을 따냈다. 1897년 을미사변이 일어났으나 아관파천으로 러시아는 고종의 영향력을 활용, 절영도 조차 시도도 있었다.
러시아 제국은 또한 1900년 의화단 운동을 진압한 뒤 만주에서 철수하지 않고 점령을 지속하여 만주를 식민지로 만들고 더 나아가 대한제국의 용암포를 점령, 조차, 개항함으로써 한국 역시 영향권 하의 완충국이나 보호국으로 만들 의향을 보였다(1903년의 용암포 사건).
러시아의 이런 움직임 때문에 러시아의 남하와 팽창을 경계하던 영국과, 신흥국으로 부상한 일본에게 커다란 부담거리가 되었고, 두 국가는 서로 간 이해관계가 들어맞아 1902년 동맹을 맺기에 이른다(영일동맹). 그리고 2년 뒤인 1904년 러일전쟁의 결과 러시아의 극동에서의 남하는 완전히 좌절되었으며, 러시아는 현실을 인정하여 영국, 미국과 협상을 맺고 '그레이트 게임'을 끝내게 된다.
사실 거문도 사람들은 오히려 영국 해군을 환영했다. 이전에도 여러 번 영국군이 상륙하면서 서로 대접을 해주고 갔기 때문에 영국 해군이 낯선 상대가 아니었을뿐더러 영국 해군은 진지 보수나 포대 설치 작업시 부족한 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거문도 주민들을 고용하여 작업에 동원했다. 하지만 본토의 탐관오리들과는 달리 백성을 마구잡이로 부려먹은 것이 아니라 주민들이 제공해 준 노동에 대한 댓가에 언제나 정당한 비용과 보상을 치른데다가 식량 배급과 의료 혜택까지 무료로 베풀었다. 당시 영국군은 주민들에게 보상을 해주기 위해 조선인들에겐 쓸모가 없는 파운드 스털링 대신 곡식, 염장고기, 통조림이나 술 등의 보다 실용적인 물건으로 보상했다. 나중에는 당시 조선에서 통용되던 화폐를 따로 조달하기까지 했다. 당시 조선은 관의 착취 등으로 민초들의 생활이 피폐해진 상태였는데, 일은 일대로 죽어나게 시키면서 보수도 제대로 안 주고 백성들을 등쳐먹기까지 하는 탐관오리들과는 달리 갑툭튀한 코쟁이들은 생긴 게 좀 기묘해서 그렇지 일을 시키면 반드시 정당한 대가를 주니 오히려 주민들이 영국 해군을 물심양면 도와줬다고 한다. 그래서 2년 후 철군할 당시 주민들이 매우 아쉬워했다고.
당시의 일화가 재미있는데, 영국 해군은 엄밀히 말해 침략군으로서 들어왔지만 거문도 주민들과의 마찰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대민 물의를 최소화하려는 지휘관의 명령으로 주민들 거주 구역엔 얼씬거리지도 않았다고 한다. 특히 여자들과의 충돌이 있을까 봐 빨래터 근처를 지날 때는 각별히 주의를 가해 여자들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우물가에서 물 한 모금을 떠마실 때에도 반드시 동전 한 닢을 두고 갔다는 회고도 있다. 시대상을 보면 현재도 모범이 되는 영국 해군의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야사에 따르면, 거문도에 살던 젊은 여자 무당에게 반한 한 수병이 몰래 수영을 해서 만나다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니면 쓰러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물론 실제로 그런 사건은 없었다는 것이 연구 결과이나 이런 야사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영국군과 거문도의 백성들이 친밀했다는 이야기의 반영이라는 평가가 많다. 10여 년 전 방영했던 거문도 점령 관련 다큐멘터리에서는 거문도 주민이 전혀 다른 에피소드를 들려줬는데 당시 영국 수병이 무당 혹은 과부를 밤에 몰래 몇 번 찾아갔다가 발각되었고 조선의 남녀 유별 전통을 잘 아는 지휘관이 장병들과 거문도 주민이 보는 앞에서 강도 높은 처벌을 했는데 수병을 뱃머리에 세워두고 걷어차서 수병을 바다에 빠뜨리면 수병이 헤엄쳐서 배에 오르고 배에 오르면 다시 뱃머리에 세운뒤 걷어차서 바다에 빠뜨리는 걸 몇 번이나 반복해서 거의 반죽음 상태에 이르러서야 처벌을 그쳤다고 한다. 아마 이 에피소드가 바다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로 와전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강도 높은 처벌이 본보기가 되어 특별히 알려진 대민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또 다른 일화가 나왔다. 당시 영국군이 장병들의 식량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소를 상당수 구입해서 거문도 산간에 방목했는데, 특별히 지키는 사람을 두지 않았다. 이를 보고 동네에 살던 점잖아 보이는 노인 한 명이 매일 한 마리씩 훔쳐갔다고 한다. 영국군은 소가 한 마리씩 사라지는 일이 발생하자 몰래 숨어서 훔쳐가는 사람의 사진을 찍은 뒤, 소가 사라진 다음날 노인을 붙잡고 훔쳐간 소를 돌려달라고 했다. 노인은 딱 잡아떼었지만 영국군이 노인이 소를 몰고가는 사진을 증거로 내밀자 결국 훔쳐갔음을 시인하고 소를 돌려줬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거문도 사람들은 사진이란 것을 몰랐는데 실물과 똑같은 모습이 종이 안에 있음을 보고 다들 놀라며 신기하게 여겼다 한다.
물론 이 이야기 또한 풍문으로 보이는데 당시 사진촬영은 무척이나 귀하고 어려운 것으로 촬영을 하기 위해선 피사체가 최소 30분 가량을 부동자세로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다가 준비 하는데 시간과 비용도 많이드는 관계로 기념일이나 중요인물을 촬영할때나 사진을 찍었지 무슨 현대의 몰카 촬영 마냥 사용했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거짓이다. 소가 몇 마리 있었다는 사진을 미리 찍어놓고 사진에 있는 소의 숫자와 현재 남아 있는 소의 숫자를 비교해서 없어졌다는 것을 증거로 내밀 순 있었을 것이다.
한번은 빅토리아 여왕의 생일날에 축포를 쏘기로 했는데, 영국군은 사전에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함포 소리에 놀라지 말라고 미리 당부를 해뒀었다. 주민들은 대포 터지는 것을 구경하러 나갔는데 문제는 이때 개들이 포 소리에 놀라 다 산으로 도망갔고, 영국 해군에서는 외교 문제를 고려하여 영국 해병대원들을 풀어 개 수색에 나섰다. 그 밖에도 조선에서 최초로 테니스를 했다고 알려졌고, 통조림을 먹었다거나 하는 일화도 있다.
오히려 영국 해군을 경계하기 위해 들어왔던 다른 나라의 군대들이 대체로 주민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러시아 해군은 군기가 문란하고 기강이 무너져 있어 행패를 자주 부렸으며 군사들이 죄다 술에 쩔어 사는 알코올 중독자다 보니 현지 주민과 마찰이 특히 심각했고, 프랑스 해군은 가는 곳마다 측량을 하겠답시고 지붕 위로 뛰어다녀서 주민들의 원성을 샀다. 그나마 네덜란드 해군은 곱게 테를 두른 모자가 인상적이었으며, 가는 곳마다 깃발을 많이 휘날렸다는 것 정도만 회고했다.
1960년대에 정부에서 그때까지 살아있던 거문도의 90대, 100대 노인들에게서 영국군의 지배가 어땠는지를 묻는 설문 조사가 있었다. 노인들은 영국 해군들에게 배운 영어와 요들송을 그때까지 기억했다고 한다.
거문도에 머물 당시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수병들의 묘가 아직 3기가 남아있는데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방한 당시 거문도를 방문하여 묘소를 참배하고 가려고 했지만, 엘리자베스 2세의 일정이 바뀌어 오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만 종종 주한 영국 대사가 와서 참배하곤 한다. 사실관계만 보면 불법 점령군을 추모하는 묘한 상황이지만, 한국에서도 이 사건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별로 주목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2년간 단기간 점거, 영국군의 신사적인 행동과 현지 주민과의 우호적 공존, 사건 자체에 대한 낮은 인식 등) 이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는 딱히 없다. 당시 주민들은 상술했다시피 오히려 조선 조정의 지배하에 놓여 있을 때보다 훨씬 나은 대접을 받았다.
또한 영국 해군 동양함대는 1930년대까지 비정기적으로 거문도에 기항했으며, 2005년부터 주한영국대사관 명의로 거문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한다.